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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독재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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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독재를 경계한다

<벼리의 돋보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기명투표

벼리 | 기사입력 2008/12/02 [22:34]

의회독재를 경계한다

<벼리의 돋보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무기명투표

벼리 | 입력 : 2008/12/02 [22:34]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걸고 삽니다. 그 이름이 고유명입니다. 대체가 불가능한 이름, 번역이 불가능한 이름, 그것이 고유명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무언가 잘했다고 그에게 고마움을 돌리거나 반대로 무언가 잘못해서 책임을 물을 경우, 우리는 반드시 그의 고유명을 거론합니다. 그래서 이대엽 시장을 두고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염두에 두면서 그를 평하라면 저는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합니다. “이대엽 시장은 유능한가? 무능한가?”, “이대엽 시장은 성남 역대시장 중 가장 형편없는 시장이다.”

사람이 고유명을 갖게 되는 것은 고유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유한 삶이 없다면 결코 고유명을 갖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르게는 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없습니다. 물론 그 고유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저는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합니다.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실은 자기가 자기 얼굴을 알지 못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유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저는 삶의 경험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 2일 분당 남·북분구안이 성남시의회에서 무기명 투표결과 찬성16, 반대13, 기권2로 통과되었다.    ©조덕원

가령, 제 속으로 낳고 기른 자식을 잃고 가슴에 묻은 그 자식을 슬픔으로 어루만져온 한 어미의 슬픔 앞에서 저는 그 어미에게 남겨진 어느 자식의 고유한 삶을 느낍니다. 저와는 다른 삶의 태도를 가졌지만 당신 방식대로 살다 가신 제 아버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저는 아버님의 고유한 삶을 느낀 바 있습니다. 이 민족에게 불멸의 영웅으로 남아 있는 이순신이란 이름 앞에서 저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순신의 고유한 삶을 느낍니다.

요컨대 고유한 삶이란 기억되는 이에게 잊을 수 없는 삶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기억의 단위가 개인 차원이든 소수적 차원이든 민족과 같은 공동체이든 기억되지 않은 이와는 공유될 수 없는 삶이 바로 잊을 수 없는 삶으로서의 고유한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삶이 훌륭한 삶, 비극적인 삶, 아름다운 삶 따위로 말하는 것은 결코 고유한 삶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말해진 삶은 굳이 잊을 수 없는 삶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충분히 공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유명에는 사람 이름 외에 지명도 있습니다. 가령 성남이라는 이름이 그렇습니다. 성남이란 고유명을 가진 지역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저는 성남사람임을 느낍니다. 30여 년 전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성남이 철거민도시라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저를 부당하게 대우하던 한 대학 동기와 언쟁 끝에 화가 나서 그를 두들겨 패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서울에서 그냥 살았다면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 성남에서의 소중한 삶의 체험들, 그 가치가 이미 제 몸에 새겨져 있었던 탓에 싸움질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유성에 대한 자각은 가령 그것이 사람 차원이든 지역 차원이든 상대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불러일으킵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삶이나 몸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긍지감, 책임의식, 애정, 변화에의 동참 같은 것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부 시의원들이 판교신도시에 판교라는 고유명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도시의 브랜드가치라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이는 저와는 출발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비전 측면에서 제시된 그들의 근거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앞서 저는 판교에서 이루어질 판교사람들의 삶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2일 분당 남·북분구안이 성남시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결정은 성남시라는 지방자치단체의 뜻은 판교를 판교로서, 판교사람을 판교사람으로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우선 그것은 일부 정치세력과 야합한 무능하고 무원칙한 이대엽 시장의 결심의 산물입니다. 여기에 공무원 인원감축이란 시대의 대세 앞에서 발버둥치며 저들만 살겠다고 이 시장의 앞잡이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공무원들의 역할도 거론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대엽 시장과 공무원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간 성남시의회의 책임이 큽니다. 그것은 스노비즘과 같은 것입니다. 주목해볼 점은 성남시의회가 동원한 무기명투표입니다. 그것이 판교와 판교사람을 죽인 것과 다름없는 결정을 내리는 데서 전부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무기명투표가 의미하는 것의 핵심은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고유명을 가진 의원 스스로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성남시의회라는 고유명을 가진 공식기구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첫째, 무기명투표는 의원의 고유명을 드러내지 않는 투표방식입니다. 자기의 고유명을 걸고 책임질 일을 회피하려는 얄팍하고도 비겁한 수법입니다. 그것은 자기부정에 다름아닙니다. 무기명투표는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의 불일치, 자의성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원 스스로 나는 시민의 대표가 아니라는 자기고백과 똑같은 것입니다. 앞으로 책임질 일을 책임지지 않고 시민들 앞에서 시민의 대표라고 우기는 의원이 있다면 그 입 다물라고 호통을 쳐도 괜찮습니다.

둘째, 무기명투표는 성남시의회라는 고유명도 부정해버리는 투표방식입니다. 성남시의회는 그냥 성남시라는 지자체의 한 구성부분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수많은 지방의회의 하나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성남시의회라는 고유명을 가진 공식기관입니다. 성남시의회는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성남시의회는 이런 고유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말았습니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무기명투표를 했기 때문입니다.

무기명투표를 통한 이런 이중의 부정이라는 점에 주목해보면 성남시의회의 결정은 원천무효입니다. 요컨대 성남시의회는 아무개 의원이라는 자기의 고유한 이름, 성남시의회라는 고유한 공식기구의 이름을 걸지 않고 비열하게 숨어서 투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확히 이것은 의회독재입니다. 의회독재를 시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남시의회가 기명투표를 통해 이번 결정을 자진 철회하고 제대로 된 새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의회독재를 부정하는 길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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