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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거부선언과 21세기 야학(野學)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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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거부선언과 21세기 야학(野學)을 꿈꾸며

“나만 살고자 하는 경쟁교육에서 인간이 최우선 가치가 되는 소외되지 않는 교육환경 만들어야”

조주현 | 기사입력 2012/01/13 [01:38]

대학입시거부선언과 21세기 야학(野學)을 꿈꾸며

“나만 살고자 하는 경쟁교육에서 인간이 최우선 가치가 되는 소외되지 않는 교육환경 만들어야”

조주현 | 입력 : 2012/01/13 [01:38]
지난 4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윤봉길의사가 직접 만든 <농민독본>(農民讀本)의 일부가 80년 만에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윤봉길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자퇴한다. 그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여 스스로 학교를 떠났지만 나라를 빼앗긴 민중에게 무엇보다도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19세에 야학을 세우고 직접 교재를 만들어 빈농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 최용신 선생과 샘골마을 사람들이 세운 야학과 어린이 ⓒ 최용신추모홈페이지     © 성남투데이

항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빛나는 야학운동의 전통

야학교사 윤봉길은 시대의 부름에 분연히 일어선다. 1932년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에서 사제폭탄을 던져 상해 일본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 침략전쟁의 원흉을 처단한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칭송할 정도로 일제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조선과 중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기념비적인 의거였다. 의사는 목숨을 건 의거를 앞두고도 상해에 노동야학을 만들었고 마지막까지 가르치는 것을 놓지 않은 독립투사이자 민중교육자였다.

윤봉길의사 이외에도 안중근, 이회영 등 많은 독립운동가와 일제에 맞선 신간회의 전국적 야학운동,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존 주인공 최용신과 같은 이들의 야학운동과 헌신은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빛나는 민중교육의 전통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하던 야학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의 역사 속에서도 계속된다. 아니 그 5월 광주민주항쟁 정신의 정점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불야학’은 78년 7월 광주에서 최초로 생긴 노동야학이었다.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를 필사하며 YWCA에서 최후를 맞이한 박용준,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윤상원(시민군 대변인),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교도소 내에서 40여일의 단식투쟁을 하다 숨진 박관현 등은 모두 들불야학의 교사들이었다.

전태일, 김종태, 김진숙

성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5월 광주항쟁이 처절하게 진압당하고 구속과 투옥이 난무하던 80년 6월9일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몸을 불사른 김종태열사도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성남으로 밀려와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태 열사는 당시 천막야학(성남 은행동 제일실업)에서 배우고 후에는 스스로 ‘한울야간학교’(성남시 단대동 소재)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등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야학의 정신은 2011년에 다시 타오른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은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중학교도 졸업 못한 채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학교 밖 청소년이었다. 고된 삶속에서도 그녀는 ‘누더기가 된 인생을 기울 수 있는 실과 바늘은 학교뿐이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공부를 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대학생이 꼭 되고 싶은 문학소녀였다.

그러나 누구나 꿈꾸던 그녀의 소박한 꿈을 세상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찾은 곳은 야학(‘억새풀야학’)이었고 거기서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전태일이다. ‘그 책(『전태일평전』)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김진숙,『소금꽃나무』 47쪽)

전태일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공식학력의 전부이다. 전태일에게도 아주 잠시나마 ‘내 평생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청옥야학 시절이다. ‘나는 내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야학마저도  ‘죽기보다 싫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배움을 중단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을 스스로 공부하였고 어머니에게도 가르쳤다.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대학생 친구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홀로 배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나를 알게 한다.

전태일은 자신을 불사른 후에야 대학생 친구를 얻게 된다. 수배 중에 ‘전태일평전’을 집필한 대학생 친구 조영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태일의 삶을 따랐고 80년대 박기순, 윤상원 같은 수많은 대학생 친구들은 야학교사가 되어 또 다른 전태일을 가르쳤다.    

이처럼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며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안고 살아왔던 야학의 역사는 한국 사회를 넘어 세계 어느 교육의 역사에 비추어도 모자람이 없는 진정한 교육의 이상을 구현한 것이었다.

위기 때마다 부활하여 소외된 이들을 부여안고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세계를 감동시키는 야학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야학의 바탕에 흐르는 도도한 시대정신 때문이다. 이 시대정신은 다름 아닌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으로부터 나온다. 육신의 배고픔보다 배우지 못하는 배고픔이 죽기보다 더 싫었던 전태일처럼 가장 소외받는 이들의 열망과 바람이 바로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고 야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순호가 학당에 나오게 된 동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울었다. 스물 두 살 나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중학과정을 공부하는 야학에 나오게 되었을까?…못 배운 자들. 이것 때문에 죽도록 일해도 대가를 못 받는 사회. 버림받고,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이 아픔을 당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윤상원씨의 1979년 2월7일 일기)
 
오늘,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과 21세기 야학운동

▲ 청옥야학 출신의 전태일 열사.     © 성남투데이
이제 2011년 우리사회의 현실을 보자. 지난 11월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투명가방끈모임’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대학과 입시를 거부하는 집단 선언을 하였다. 전태일이 그토록 소망했던 대학생 친구들이, 김진숙의 꿈이었던 대학생과 청소년들이 스스로 대학을 거부하고 입시를 포기한 것이다.
 
연이은 대학생들의 자살과 살인적인 대학등록금으로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설사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반수 이상이 실업자 신세거나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대학졸업은커녕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한해 7만 명을 넘어선 학교 밖 청소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따라서 대학거부선언은 입시지옥을 만들어 내고 대다수의 실업자를 양산하는 망할 놈의 대학(大學)민국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선언한 생존권선언인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의 문제는 예전의 야학이 교육을 통해 싸워왔던 일제나 군부독재가 아니라 경쟁과 서열화로 수많은 낙오자를 만들어 내는 자본화된 교육 그 자체이다. 암울한 시대와 삶을 바꿔나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교육이 썩어서 오히려 시대의 목줄을 죄고 있다. 승자독식의 천박한 자본주의가 국가와 사회를 장악하고 나아가 사람을 살리는 교육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숙은 이러한 파렴치한 자본의 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세계 최고의 대학등록금, 세계1위의 대학진학률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부터 반교육적 입시경쟁이 치열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반인간적 자본주의가 한국사회의 대다수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가 우리 아이들의 행복과 전혀 관계없음을, 그리고 대학은 자신들의 배만 불릴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만들어 놓은 그 공포의 위력은 절망의 끝까지 우리를 밀어 넣는다. 

시대정신을 상실한 대학, 피 땀으로 낸 대학등록금으로 건물을 쌓아올리고 졸업장 장사에만 혈안이 된 자본화된 대학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번 대학입시거부선언으로 지리멸렬한 대학과의 역사적 싸움은 시작되었다.

윤봉길선생은 ‘농민독본’ 3권의 ‘자유’편에서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민중의 자유가 없이는 개인의 자유도 없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민중의 교육 없는 개인의 교육은 참교육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만 살고자 하는 경쟁 교육에서 인간이 최우선 가치가 되는 소외되지 않는 민중교육을 만들어 갈 수 있는 21세기 야학운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기를 넘어 이 땅을 바꾸어 온 윤봉길, 전태일, 윤상원, 김종태, 김진숙과 이름 없이 살아간 누구보다 위대한 교사들이 있지 않은가. 또한 밤을 새워 달려가 마침내 김진숙을 살려내고 해고노동자를 살려낸 세계가 놀라는 수많은 희망버스 탑승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김진숙을 구해냈듯이, 절망의 교육에서 고통 받는 이 시대를 구하기 위해 또 다시 들불처럼 야학(夜學)이라는 희망버스를 탈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밖청소년배움터 디딤돌학교 교사

#. <조주현 교육이야기> 칼럼은 성남투데이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 TONG(通)에도 게재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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