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을 지배하는 이대엽적 불안코드

[특별기고]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성남시 도시공간정책

하동근 | 기사입력 2007/02/19 [23:41]

성남을 지배하는 이대엽적 불안코드

[특별기고]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성남시 도시공간정책

하동근 | 입력 : 2007/02/19 [23:41]
‘이대엽적 불안’과 피부마비

최근 성남시 행정을 지배하는 코드가 있다면 ‘이대엽적 불안’이다. 그리고 이 불안의 병적 징후는 피부마비(cutaneous paralysis)로 나타난다. 피부마비는 환경변화나 자극들에 대한 정보가 중추신경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병리현상을 초래한다. 이런 것이다. 외부적으로 청렴도 전국 꼴찌라는 치명적인 자극이 중추에 전달되면 자정선언과 자정운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지만(아산과 목포는 좋은 예이다), 성남이라는 판단중추는 반응이 없다가 최근에 아주 미약한 주의환기 수준의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올해는 판교개발이 본격화되어 청렴위기의 환경이 조성되어 청렴도를 유지하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시립병원 설립과 재개발과 관련된 정보들을 중추까지 전달하기 위하여 자기 파괴적인 자극싸움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감각뉴런들은 마비에 빠져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용역보고회에 시의원은 물론 통장마저도 배제시킨 채 공무원만 선택할 정도로 시민과의 교감을 무서워하고 있다. 이러한 말초신경계의 마비를 초래한 배경에 ‘이대엽적 불안’이 있다.

▲ 이대엽 시장이 지난 8일 성남지원으로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인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이 시정운영의 불안적 요소가 점차 가중되고 있다.    ©성남투데이

‘이대엽적 불안’은 사법적 불안이다. 한나라당 일당지배가 현실화된 이래 시민들은 시장이나 시의회의 양심에 그들의 운명을 걸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구조적으로 브레이크가 없는 위험한 자동차에 승차한 100만은 제발 그들이 음주운전이나 철없는 난폭운전을 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견제와 감시를 위한 장치들은 그 기능이 제한 당했다. 그런데 기관 외부에 있는 정지장치가 ‘사법적 판단’인 것이다. 1차 판단의 내용은 ‘운전사의 교체’이다. 운전사 제거의 가능성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대엽적 불안’의 병소는 이 ‘가능성’이다. 키엘케고르는 불안의 심리학적 근거를 가능성에서 찾고 있다. 신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했을 때 아담은 ‘따먹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먹을 수도 없는 놈에게 따먹지 말라고 금지시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에 그는 몸이 떨리는 불안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불안을 ‘아담적 불안’(종교적 윤리적)이라고 하자. 데카르트는 신에게서 인간을 확실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자명성’이 있는 요소들로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으로 구성하는 합리주의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 자명성의 가능성을 그는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코기토 에르고 줌’이었고 그 가능성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데카르트적 불안’이라고 부른다.

‘이대엽적 불안’은 선거법 위반에 따른 법원의 1심 판결 이후 더욱 그 정도가 심화되고 그 병리현상도 심하게 뒤틀린다. 가능성과 불안은 정비례한다. 그들의 호흡은 가쁘고 체온은 위험수준까지 올라갔다. 가쁜 호흡은 일을 멈추고 안정을 취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올라간 체온은 땀을 통해서 조절이 되어야한다. 그런데 그들은 충혈된 눈으로 안정이나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성남호의 위기국면인 것이다.

성남 도시공간정책의 목표는 도심 간의 균형이어야 한다.

이 병적돌진의 방향에 시청이전이 있다. 그 속도에서는 무서운 욕망에의 집중이 느껴진다. 욕망이 아니라 합리적 정책집행이라면 공간정책에 대한 배경과 정책의 효과, 그리고 효과에서 소외될 주민들에 대한 대책 등등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백년대계’라는 뜬구름 잡는 식의 허울에 기대고 있다. 백년 살 것이 아니라고, 백년 후로 모든 것을 떠넘기는 행위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아주 부도덕한 짓이다. 그들의 철없는 돌멩이에 죽어버릴 수도 있는 개구리 신세인 시민들을 고려한다면…

성남시 도시공간의 문제는 신구시가지간을 가르는 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경계이다. 이 장벽의 실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극복할 건가에서 갈린다. 어떤 이들은 ‘구시가지’의 이름을 ‘본시가지’로 바꾸자고 한다. 순진하지만 애정만은 사주기로하자. 문화로 풀 수밖에 없다는 이들도 있다. 세 배나 차이가 나는 경제적 가치격차를 문화로 감추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 감춰서 풀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공간격차를 만들어 낸 것은 두 지역간의 인문 사회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강남에 심으면 귤이되고 방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南橘北枳남귤북지) 환경차이도 없다. 그래서 강남의 부드러운 모택동이 중원에 진출한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사람차이가 있을 형편도 못된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격차를 만들어 냈을까? 그것은 국가의 공간정책의 결과 이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공간정책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고 그 효과로 이런 격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격차를 생산한 것은 국가이지만, 왜곡된 공간을 바로 잡아야하는 책무는 성남시에로 이전되었다. 격차의 바탕은 물적이고, 물적인 효과를 생산하는 것은 도시의 공간정책이 중추적인 기능을 한다. 결국 성남의 공간정책은 구시가지의 공간가치를 상승시키도록 배치하여 신구도심간 균형을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공간문제의 균형회복은 도시의 문제근원을 해소하는 효과와 맞닿는다.

그런데 세 도심의 중심에 시청을 이전하여 균형을 유지하려는 꿈이 그들의 ‘백년대계’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 그들에게 공간은 사회와 무관한 물리적 거리로 환원된다. 그래서 계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등질화된 공간인식으로 귀결된다. 서현역의 ·1평이나 산성동의 1평은 차이가 없다. 아직 성남의 도심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텅 빈 공간이었다면 그들의 균형점은 약간의 의미를 갖는다.(전체적인 공간배치 이념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공간환경은 사회총체와 분리할 수 없는 가치를 이미 내장하고 있다. 따라서 공간의 균형은 수평적, 물리적 균형이 아니라 총체적 사회가치를 전제한 균형이 되어야 함은 행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이미 상식인 것이다. 가치의 균형!

또 하나의 개그형 주장은 새로 옮기는 곳이 분당이 아니라 구시가지라고 태연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상 중원구 여수동이기 때문이란다. 사회. 경제적 경계와 행정의 경계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순진함이 아니라면 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분당쪽 여수동과 구시가지쪽 여수동의 지가를 비교해보면 그 경제적 경계선이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문제는 확실하다. 시청이전은 균형을 회복하기 보다는 현재의 불안정한 균형마저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이성을 잃은 공간정책인 것이다. 시청은 구시가지를 받치는 균형추였던 것이다. 이러한 균형파괴는 지금의 도시문제보다 심각한 공간왜곡과 이로 인한 도시문제를 불러올 것이 뻔하다. 세배의 지가차이가 여섯 배로 늘어난다면 누가 그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한 사람을 보고만 있겠는가? 단지 몇 사람 소유의 땅값 상승을 위해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니다.

현재의 시청은 이미 35년의 짧지 않은 세월동안 시민들과 관료들이 생산 해 논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장소를 이전하는 순간에 바로 손괴되어버리기 때문에 구건물을 헐지 못하고 그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 시청은 이전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거의 없다. 공간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활용의 문제인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현상을 사유하는 방식은 천박하다. 공간을 화전민이나 유목민처럼 쓰고 버리는 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소위 노마드적 공간소비는 경계가 없는 광활한 유목민에게서나 가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현대의 성남같은 도시에서 고려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지금은 절대안정이 요구되는 때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지휘했던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서 전범재판을 받았을 때 이를 취재했던 한나 아렌트를 놀라게 했던 사실은 아이히만이 특별히 악하거나 히틀러의 이데올로기를 깊게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의 ‘평범성’이었다. ‘악의 평범성’은 우리의 상식도 뒤집어 놓는다. 주군의 명령에 아무런 판단도 없이 따르는 행동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 평범성이야말로 커다란 죄악이라는 것이다.

지금 성남시행정의 병리적 징후들에 나의 진단에 조금이라도 동의할 수 있다면, 최 홍철 부시장을 비롯한 관료들의 행태는 바뀌어야할 것이다. ‘주체적 판단’이 관료이기 때문에 불필요하다는 사고는 지양되어야한다. ‘정책실명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민들은 ‘폭력적’정책을 수행하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느 부서로 가든지, 어느 지역으로 가든지 책임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아렌트는 폭력과 권력을 시민적 동의를 기준으로 대립되게 해석한다. 도시의 공간정책은 물적 효과와 직결되고, 그것이 시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인 것이다.

자 이제 모두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절대안정을 취할 때가 되었다. 호흡이 부드러워지고 혈압이 안정을 되찾으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질 것이다. 그때 다시 시작하기로 하자./시청사 이전반대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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