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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시장만든다’는 말이 뭔 말인고?

[벼리의 돋보기] '희망21'에 대한 편견

벼리 | 기사입력 2005/05/15 [17:19]

‘누구를 시장만든다’는 말이 뭔 말인고?

[벼리의 돋보기] '희망21'에 대한 편견

벼리 | 입력 : 2005/05/15 [17:19]
생활자치네트워크 '희망21'을 두고 말들이 많다. 하긴 유례없는 새로운 실험에 말이 없을 수 없다. 유독 말 많은 동네라는 느낌도 없지 않고. 그 말들 중에는 쓸 만한 말도 있고 쓸 만하지 않은 말도 있다. 쓸 만한 말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아직은 좀 벅차다. 또 희망21의 입장에서도 갓 출발한 시점이라 아직은 숙고의 시간이 요구되고 경우에 따라선 감당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서다. 여기선 다만 쓸 만한 말이 기대와 동시에 우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 밝혀둔다.

▲ '희망21' 창림대회가 끝난 후 열린 2부 희망콘서트에서 참석자들이 함께 호흡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성남투데이
 
쓸 만하지 않은 말에는 최소한의 것이 있고 최대한의 것이 있다. 최소나 최대가 결국 공히 범위에 관계되므로 그것들은 일맥상통한다. 그럼, 최소한의 것이란 무엇인가? 희망21이 정치집단이라는 것이다. 시민을 빙자한. 최대한의 것은 무엇인가? 희망21이 누구를 시장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누구는 거명하지 않기로 한다. 공론장에서 개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자체가 당사자에 대한 모독이며 무엇보다도 여기서 다루는 문제의식에 대극되기 때문이다.
 
그럼, 최소한의 것에 대해서 묻자. 왜 희망21을 시민을 빙자한 또는 볼모로 한 정치집단이라고 말하는가? 정치집단은 권력쟁취를 빼놓고는 말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물음은 상론할 경우 희망21이 생활자치네트워크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권력 쟁취를 목적하는 정치집단으로만 몰아세우느냐, 하는 물음으로 바꿔 볼 수 있다.
 
편견이란 무엇인가? 개인을 두고 말할 경우 자신이 구성해 놓은 의견이나 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재하거나 해석해낼 수 있는 여럿을 하나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하나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 이 집착된 의견을 바로 편견이라고 부른다. 이런 편견은 집단이나 경향에도 적용된다. 희망21을 정치집단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분명 편견이다. 그것은 결코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이로부터 ‘왜 희망21을 정치집단이라고 말하는가’라는 물음은 ‘누가 희망21을 정치집단이라고 말하는가’로 바꿔 볼 수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편견을 서슴없이 말하고 나아가 편견을 유포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아무리 겉으로는 시민운동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그럴듯한 점잖음을 빼도 실제론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부류에 속한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은 물론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르면 치고박고 싸우는 게 생리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라서 못마땅하다고 하면 뭐라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방자치에 대한 방기나 모독과 관계가 있고 이런 맥락에서 희망21을 하나의 표상으로서 공격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시비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여기에서 성남지역사회에서 작은 생활적 실천에서부터 지방권력 장악에 이르기까지 지방자치를 염두에 두고 실천한 정치세력은 부재하다는 점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성남지역사회에서 진정한 지방자치세력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방자치를 아냐 모르냐의 차이, 그것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정치적 이해관계의 차이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차이의 의미는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서나 성남지역사회를 염두에 두고서나 정치적 이해관계의 차이가 따라올 수없는 심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편견을 서슴없이 말하고 심지어 널리 유포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쳇말로 정신 차릴 때까지 두들겨 맞아야 한다.
 
그럼, 최대한의 것에 대해서도 묻자. 왜 희망21을 누구를 시장 만든다고 말하는가?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희망21이 누구를 시장 만들기 위한 정치집단이라는 말이다. 더 까발려 말하면 희망21은 누구를 시장 만들기 위한 정치적 사조직이라는 말이다. 그럼 희망21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그 누구의 들러리들인가? 그 시민들은 호구인가? 그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그 누구에 기대거나 아니면 그 누구를 이용해 시의원 자리라도 하나 차지해보려는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인가? 그런가? 과연 그런가?
 
그러나 희망21에 대한 이런 말은 생활자치네트워크를 표방하는 희망21에 대한 최악의 편견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희망21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당당하게 분노로서 대답해도 좋은 심각한 위해의 말이다. 이 말은 편견도 편견이지만 편견에 앞서 아주 의도적이며 불순하다. 이 의도적인 불순함은 그들이 말하고 지금 성남지역사회에 널리 유포하는 그 말 자체에서 나온다. 그들의 말을 하나의 물음으로 볼 경우, 그들이 누구를 시장 만든다는 물음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
 
그 물음은 ‘어떤 (자질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장이 되어야 하는가?’ 나아가 “어떤 (자질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물음, 성남지역사회에서 이보다 더 심각할 수 없는 문제의식을 애써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를 고민하는 2천3백여 명의 시민들(창립대회 경과보고에서 제시된 수치)이 참여하는 희망21이 그 누구를 시장 만들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성남지역사회가 부족한 게 있고 잘못된 일이 벌어지곤 한다 치더라도 이런 일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물음은 물음 자체에 의해서 가장 잘 처리된다는 말이 있다. 잘못된 물음은 잘못된 답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물음)누구를 시장 만든다? (답)누구를 시장 만들기 위해 2천3백여 명의 시민이 들러리를 한다. 2천3백여 명의 시민들은 호구들이다. 결국 잘못된 답을 요구하는 잘못된 물음은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따라서 잘못된 물음은 물음 그 자체를 쓰레기통 속으로 구겨 처넣어야 한다!
 
말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통해 그 말의 의미와 지시대상을 일치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말로서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따라서 독단 아니면 편견이다. 흔히 정치라는 판에서 난무하는 그것이다. 이런 말은 그 말을 쓰는 맥락을 포착해 말로서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그 의도를 폭로해 그것이 독단이요 편견임을 드러내면 된다. 이것이 이 글에서 채택한 문제의식 곧 말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말의 의미와 지시대상을 일치시키는 방법이 아닌, 현실에서 어떻게 말하느냐는 쓰임을 다루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희망21을 시민을 빙자한 정치집단이라고 말하는 것, 누구를 시장 만드는 정지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편견이다. 전자는 최소한의 편견이며 후자는 최대한의 편견이자 최악의 편견이다. 특히 후자는 의도적인 불순함이 개입되어 있다. 성남지역사회에 유포되어 있는 이런 편견들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희망21에 대한 두려움을 엿보게 한다. 비유컨대 어린것에게 시비 거는 어른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희망21은 이들 편견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고슴도치 움추러들듯 싸울 필요는 없겠다. 그것도 말이냐고 아주 가볍게 대꾸해주거나 면박을 주며 한두 마디 뼈 있게 던져주면 되겠다. 그럼, 거꾸로 희망21에 대한 기대는 가능한가? 빛과 그늘의 공시적인 관계처럼 기대는 우려를 동반한다. 기대와 우려에 관계된 쓸 만한 말은 앞서 밝힌 대로 좀 더 시간을 갖고 말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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