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Undefined index: HTTP_ACCEPT_ENCODING in /home/inswave/ins_news-UTF8-PHP7/sub_read.html on line 3
만물은 서로 돕는다:
로고

만물은 서로 돕는다

〔벼리의 돋보기〕 <화려한 휴가>와 상호부조

벼리 | 기사입력 2007/08/26 [01:00]

만물은 서로 돕는다

〔벼리의 돋보기〕 <화려한 휴가>와 상호부조

벼리 | 입력 : 2007/08/26 [01:00]
“광주항쟁은 코뮨(민중자치)의 가능성을 넉넉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패한 항쟁이건, 성공한 항쟁이건 무릇 모든 변혁의 과제는 단순히 자연발생적인 민중저항만으로 이뤄낼 수 없다. ‘도청 사수’를 주도한 항쟁 지도부가 없었더라면 광주항쟁은 한낱 반란이나 사태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광주항쟁을 온전히 항쟁으로 만든 선구자들을 그려내지 못하는 한, 어떤 광주 영화도 역사의 교재로 쓰일 게 못 된다. 빗나간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차라리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최근 인터넷언론 프레시안에 <‘화려한 휴가’ 유감>이란 제목의 독자기고로 실린 글의 한 대목입니다. 실은 이 글의 논지를 드러내는 ‘핵심대목’이라 가려 뽑았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의미있게 읽어낸 글을 여러 편 읽었습니다만, 이 글은 이 영화에 제가 보내는 시선과는 가장 반대편에 선 ‘어떤 생각’을 드러내고 있어서입니다. 참고로 기고자는 ‘전태일을 따르는 노동연구소 이사’를 하는 정은교라는 분입니다.

▲ 화려한 휴가 영화 포스터.     © 성남투데이

인용한 대목에서 광주항쟁이 코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진술이 나옵니다. 코뮨이라니요? 이 진술은 1871년에 있은 파리 코뮨의 경험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모든 변혁의 과제는 단순히 자연발생적인 민중저항만으로 이뤄낼 수 없다. ‘도청 사수’를 주도한 항쟁 지도부가 없었더라면 광주항쟁은 한낱 반란이나 사태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라는 이유를 달았다는 점에서죠. 말하자면 코뮨을 지도 곧 이끄는 자들과 피지도 곧 따라가는 자들의 관계로 성립된 민중혁명정권으로 해독하는 시각입니다. 따라서 광주항쟁은 이런 의미의 코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광주항쟁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혁명(변혁)이라는 특정 시기에만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관점이 아닌가 싶고, 특히나 ‘재현/대의(representation)의 정치학’이라는 시각에서 여전히 대중이 따라야 하는 이데올로기나 대표라는 것을 상정하는 시각입니다. 그것은 ‘효율성’의 요청 곧 공리주의적 발상일 뿐입니다. 그 결과는요? 민중은 결국 역사의 풍경으로 간주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런 변혁의 운동사는 주인을 바꿨다고 주인-노예관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지 않았습니까. 코뮨에 괄호치기로 ‘민중자치’라면서요? 이끄는 자 따로 따르는 자 따로, 이게 과연 민중자치 곧 ‘코뮨’이 될 수 있을까요? 앞뒤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코뮨이 ‘민중자치’라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집합체’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코뮨(commune)이란 말이 어원상 ‘함께’를 뜻하는 ‘com’과 ‘선물’을 뜻하는 ‘munis’가 결합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코뮨이란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결합된 집단적 관계라는 것이죠. 선물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주는 것입니다. 결코 (상)거래나 교환이 아니죠. 상거래나 교환이 착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 아닙니까. 남에 대한 배려, 상생의 자세 없이는 선물이란, 따라서 선물을 그냥 주는 코뮨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코뮨을 '공동생산, 공동소유'의 의미로 가져간 코뮤니즘(communism) 곧 공산·공유주의(共産·共有主義)는 왕창 잘못 나간 것입니다.

어원학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코뮨은 서양 중세에 발생했는데 당시 코뮨이란 ‘상호부조의 서약’이란 의미였습니다. 곧 남에 대한 배려, 상생의 자세를 발휘하는 것이 사회적 관계로 성립된 집합체를 의미했습니다. 광주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반란군들이 자행한 잔혹한 학살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서거나 물심양면에서 시민군을 챙겨준 것은 바로 이 상호부조의 전면적 실천에 다름 아닙니다. <화려한 휴가>에서 이 상호부조의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은 바로 간호사 박신애(이요원)에게서 보입니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그의 간호활동, 심지어 택시운전기사 강민우(김상경)를 죽이려는 군인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마는 그녀의 무의식적 행동에서도 이 상호부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비록 자본주의적 상거래에 포섭된 사회적 관계가 지배적인 세상, 참으로 야박하고 굴욕적이기까지 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상에서 다양한 상호부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상호부조가 경제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상호부조는 단지 사회적 유대를 위해서 행해질 뿐입니다. 여기엔 어떠한 계산도 틈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우리의 행동입니다. 그것은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계산된 삶이나 하다못해 거짓 도덕으로 포장된 위선적인 삶보다야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때, 어떻습니까, 고결하지 않습니까! 아니 기쁘지 않습니까!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쟁포로들이 키에프의 거리를 지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이를 본 러시아의 농촌 여인들은 그들의 손에 빵이나 사과 때로는 동전 따위를 건네준 바 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와 여자들은 적과 동지, 장교와 사병 등을 가리지 않고 다친 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전쟁이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마을을 떠나지 못한 늙은 농민들은 민회를 열어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의 논밭도 경작해주기로 결정하고는 적의 포화를 무릅쓰며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전국에 걸쳐 협동 취사장과 공산당원 식당이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벨기에를 위해 자발적인 원조를 보냈고, 러시아 인민들은 국토를 유린당한 폴란드인들에게 원조를 보냈다. 벨기에와 폴란드를 돕기 위해 벌어진 운동에는 무보수로 참여하는 자발적 행동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발휘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위선적인 행위라는 의미의) 자선행위의 속성이 사라진 대신 순수한 이웃돕기가 이뤄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사실들과 유사한 일들은 이외에도 곳곳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는 새로운 생활방식의 씨앗이다. 이런 경험들은 마치 인류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발휘된 상호부조가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의 가장 진보적인 제도들을 낳은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제도들을 이끌어낼 것이다.”(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서문 중에서)


 
  • 만물은 서로 돕는다
  • 많이 본 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