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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의 눈, 한복판에 ‘누가’ 있나?
‘감시의 눈’이 사라지는 그날까지!(끝)

[문화/하다말다] 이대엽호 ‘권력화’ 강력히 견제해야

벼리 | 기사입력 2006/07/31 [23:33]

감시의 눈, 한복판에 ‘누가’ 있나?
‘감시의 눈’이 사라지는 그날까지!(끝)

[문화/하다말다] 이대엽호 ‘권력화’ 강력히 견제해야

벼리 | 입력 : 2006/07/31 [23:33]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정치를 계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나는 “권력은 판옵티콘(panopticon, 전방위감시체제)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  성남시가 CCTV 카메라를 설치하고 모니터를 통해 민원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조덕원

세 사람을 묶는 키 워드가 있다. ‘폭력’이다. 잔인한 것. 살상, 고문, 구타, 학대, 구금…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폭력을 받는 몸의 입장에서는 고통 그 자체다. 고통은 육체적일 뿐 아니라 정신적이다. 인간의 몸은 독특하다. 육체적이며 정신적이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에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수모, 인간성 그 자체의 실험까지 뒤따른다.

폭력은 금지되어야 한다. 분명하다. 폭력을 독점한 정부는 제한되어야 한다. 분명하다. 가장 적게 지배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다.

오늘날 폭력은 감시가 되었다. 감시는 폭력이다. 감시는 시각적인 폭력, 고도화된 폭력이다. 인간을 확장하는 기술 덕분에 권력은 직접적인 폭력을 ‘시각적인’ 폭력으로 탈바꿈시켰다. 직접적인 지배에서 시각적인 지배로. 데카르트적 이성의 산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이성이 ‘보는 나’ 곧 ‘시각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나(고립된 주체)’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보는 나,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떠서 전부를 내려다보는 태양과도 같다. 그러나 태양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권력은 태양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판옵티콘이다. 전방위적인 감시체제다. 푸코는 판옵티콘이 몸을 겨냥한 근대의 시각지배체제를 구체화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권력은 우리들을 시각화하고 우리들은 시각화된다. 하늘에 높이 떠 있는 태양처럼 권력은 우리들을 감시하며 우리들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한다. 푸코의 말이다.

“전방위감시체제는 이상적인 형식으로 환원된 권력메카니즘의 도식이다. 저항과 마찰 등 여러 가지 장애를 벗어난 그 작용은 시각적 효과의 순수한 구조로 나타난다. 그것은 정치기술의 한 가지 유형이다.”

무슨 뜻인가. 전방위감시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 보고 있는 눈, ‘감시의 눈’이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키 워드는 ‘감시’. 감시는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자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감시를 내면화한다는 심각한 사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간을 단일한 인간, 감시받고 감시를 내면화한 인간 아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푸코가 “감시는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질서화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이라고 말한 것은 통찰력이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분리, 감시의 내면화는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에 대한 인식을 곤란하게 만든다. 저항 역시 어렵게 만든다. 푸코가 전방위감시체제를 ‘정치기술’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시각적 폭력, 시각적 지배를 구체화한 고도의 정치기술이다. 내가 “권력은 판옵티콘(panopticon, 전방위감시체제)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푸코는 전방위감시체제가 감옥뿐 아니라 병원, 공장, 학교 등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공공공간인 시청사에 설치된 CCTV는 구체적인 사례인 셈이다. 분명한 것은 전방위감시체제가 어디에 적용되든, 그곳은 시각적 폭력이 작동되는 판옵티콘(원형감옥), 시각지배가 작동되는 판옵티콘이라는 사실이다.

시청사에 설치된 CCTV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이 심각한 사태는 권력이 사람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가두는 방식으로 길들이는 이른바 ‘훈육사회’에서 CCTV와 같은 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감시의 눈’을 작동시켜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길들이는 이른바 ‘통제사회’로의 이전을 증시한다.

중앙정부도 아닌 일개 지방정부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일개 지방정부에 불과한 성남시정부가 국가 권력화의 대안으로 말해지는 지방자치 실시의 취지를 정면에서 짓밟고 지금 얼마나 권력화의 길을 밟고 있는지 보여주는 유례없는 사태인 탓이다. 민주주의사회로 가는 도정에서 우리가 맞이한 심각한,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시청사에 설치된 CCTV문제는 요컨대 첨단기술을 이용한 지방정부의 권력화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야기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부차적인 것부터 거론해보자.

우선 인사권자인 시장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관료들의 심각한 반성이 필요하다. 말로만 요구해선 안된다. 곧 있을 행정기구 개편 시 주요 정보처리 과정의 공개, 정보처리와 정보평가의 분리, 전횡적인 의사결정의 방지대책이 반영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도록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시의회의 반성은 중요하다. 시의회의 견제야말로 관료들의 정보독점과 왜곡된 사용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견제장치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대안으로 정보통신전문가, 시민, 시의원 등이 참여하는 정보통신규제위원회 같은 상설적인 기구 설치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해결의 핵심은 지역주민과의 실제적인 접촉을 확대하고 주민과 대화하는 것이다. 누구부터? 이대엽 시장부터. 지방자치가 풀뿌리민주주의인 것은 그것이 지방정부와 지역주민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할 수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대엽 시장부터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이대엽 시장은 더 이상 시장실에만 있어서는 안된다. CCTV가 촘촘히 설치된 시청사에서만 맴돌아서도 안된다. 일상적으로 지역사회로 나와 주민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 들을 일이 있으면 듣고 설득할 일이 있으면 설득해야 한다. 그럴 마음의 자세, 능력이 없다면 지금 당장 시장직을 내놓는 게 낫다.

이대엽 시장은 시청사에 CCTV를 촘촘히 설치해야 시장 자리가 유지되는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다. 한없이 낮아져야 하는 성남시민의 왕머슴일 뿐이다. 정치인 출신의 시장은 필요없다. 주민과 함께 행정 잘하는 시장, 지방살림 잘하는 시장, 지방자치 잘하는 시장이 필요하다. 문제를 분명히 하자.

‘시청사에 설치된 CCTV, 그 감시의 눈 한복판에는 누가 있나? 이대엽 시장이 있다. 왜 그가 한복판에 있나? 성남지방자치가 부딪친 심각한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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