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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검증,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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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검증, 이제부터 시작이다

〔벼리의 돋보기〕‘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벼리 | 기사입력 2007/09/04 [22:36]

국민검증, 이제부터 시작이다

〔벼리의 돋보기〕‘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벼리 | 입력 : 2007/09/04 [22:36]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지난 8월 1일 춘천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한 말이다. 다름아닌 그에 대한 검증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그의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니 이 말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는 순간 섬뜩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후보는 그에 대한 검증에 “나를 보고 흠 있는 후보라고 하는데 젊은 시절 세계를 향해 달린 게 흠이냐”는 말도 했다. 후보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검증이라면, 그는 이 검증에 대해 ‘논리 계형(logical type)’을 바꿔 “젊은 시절 세계를 향해 달렸다”는 ‘자랑’을 과시하며 “젊은 시절 세계를 향해 달린 게 흠이냐”고 반박했다. ‘나는 자랑거리가 있는 후보이지, 흠이 있는 후보가 아니다’는 답변이다.

이 답변은 그러나 ‘논점 변경의 오류’에 다름 아니다. 이 오류는 논리 계형을 변경할 때 일어난다. 더구나 이 후보는 이 논리 계형 변경에서 ‘흠’에 관한 문제를 정반대인 ‘자랑’에 관한 문제로 자의적으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오류를 범했다. 논점 변경의 오류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인 셈인데, 흔히 하는 말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인 셈이다.

▲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지난 8월 1일 춘천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한 말이다. 다름아닌 그에 대한 검증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그의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다.     ©성남투데이

문제는 이 논점 변경의 오류가 단지 논리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현실의 문제,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그에 대한 검증에서 어떻게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버젓이 하는 그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버젓이 검증의 책무와 권리를 가진 국민에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의 중요성, 그 의미는 한 마디로 ‘대통령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선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바람직한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자질’과 ‘정책’ 면에서 후보의 면면을 검증하는 것은 국민의 책무이자 권리이다. 이 점에서 검증은 명백히 ‘국민 검증’, ‘공적 검증’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들춰내는 사적인 시비행위가 결코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를 보고 흠 있는 후보라고 하는데 젊은 시절 세계를 향해 달린 게 흠이냐”는 이 후보의 말, 곧 그의 흠을 찾는 검증에 대해 그가 자랑으로 응수한 것은 한편으로는 의도적인 논점 변경을 통해 검증을 회피하려는 정치공학적 발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검증을 사적인 시비거리로 격하하려는 그의 저급한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발언일 뿐이다.

이 후보의 정치공학적인 발언도 문제이지만 그의 저급한 정치의식은 더 큰 문제다. 거듭 말하지만 공적 검증을 사적인 시비거리로 격하하려는 탓이다. 이런 격하행위는 바로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그의 발언에서 절정으로 드러난다. 이 후보가 기독교 장로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의 말은 언뜻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는 예수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말은 예수의 말을 닮았다. 섬뜩할 정도다. 그의 말이 잊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의 말에는 ‘나’가, 예수가 없다. 예수는 이 말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음으로 그 앞에 잡혀온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했기 때문이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기  위해 몰려든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을 듣고 뿔뿔히 흩어져 버린 것은 ‘죄없는 자의 부류에 바리새인들이 낄 수 없다’는 진실을, ‘돌을 던지는 너희들이 오히려 돌을 맞아야 할 자들’이라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에 ‘나’가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잴 수 없는 심연과 감응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말은 예수의 말과 아주 닮았다. 그러나 아니다.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과는 달리 그의 말에는 이 후보 자신인 ‘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이 후보의 말은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는 예수의 말과 닮았으면서도 그 의미는 정반대로 “누구도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뜻이 되고 있다.

그가 기독교 장로이며 전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발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예수의 말의 차용이자 변용일 개연성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말은 그의 종교의식 곧 그의 기독교의식이 저급한 수준에 있다는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의 말과는 달리 ‘자기도취’에 빠진 한 기독교인의 초상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해 일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최근 아프칸 피랍사태라는 겪을 만한 일을 일으키고 말았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더구나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이 후보의 말에는 이 후보가 국민에 속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그 뜻은 그만이 국민으로부터 열외일 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자기를 언급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자기를 부정하는 말인 셈이다. 그럼, “이 후보는 이 후보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이 후보에게 가능하다. 이 후보는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없을까? 어느 쪽일까? 과연 그는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을까?

공중화장실 벽에 외설스러운 그림들, 글들이 낙서되어 있다고 치자. 이를 본 누가 외설스러운 그림이나 글 하나를 골라 동그라미를 치고 화살표를 긋고는 “낙서하지 마!”라고 낙서했다고 치자. 이것은 낙서일까? 아닐까? “성역은 없다”는 말이 언론을 통해 자주 전해진다. 귀가 아플 지경이다. “성역은 없다”는 말은 그 말을 한 사람이 포함되어야 한다. 말장난에 불과한 구두선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필요한 것은 구두선이 아니라 화두선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후보의 말이 ‘누구에게, 누구를 위해서 한 말이냐’는 것이다. 이 후보는 이 말을 누구에게 던졌는가? 자신에게? 아니다, 국민에게! 누구를 위해서 한 말인가? 국민을 위해서? 아니다, 바로 이 후보 자신을 위해서! 이 점에서 이 후보의 말은 공적 검증이라는 국민의 책무와 권리에 대한 무시로, 곧 국민에 대한 협박처럼 들린다.

“나를 보고 흠 있는 후보라고 하는데 젊은 시절 세계를 향해 달린 게 흠이냐”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


이 후보의 이런 발언은 국민의 검증 책무와 권리에 비춰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국민검증을 피해가려는 정치공학적인 발언, 공적 검증을 사적인 시비거리로 격하하는 발언이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무늬만이라는 목소리가 높지 않은가. 이 점에서 검증은, 여권 대선후보를 포함해, ‘국민 대선’의 ‘키 워드’가 될 것이다. 누구의 나라가 아니다. 국민의 나라, 우리의 나라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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