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살이’란 말은 ‘남을 살린다’란 뜻의 ‘살림’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살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복합명사입니다. ‘남을 살려야 자기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생과 공생의 원칙을 담고 있는 말인 셈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기까지 억겁의 세월과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 수많은 연계 속에서 존재 하는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 과정과 연계 속에서 어느 한 부분이 생략되거나 제외되었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래서 현대 사상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던 과정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N. Whitehead 1861~1947)는 세상의 본질을 Nexus(연계)와 Process(과정)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틀리다는 평가를 함부로 내리질 않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규정하는 ‘절대’라는 영역이 얼마나 부질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곧 자신의 삶의 전제이자 근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란 말도 그런 뜻을 품고 있습니다. 굳이 ‘살림’ 뒤에 ‘살이’를 배치한 배경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우선순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살이’를 위해 ‘살림’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서고금에 나타난 경전과 성현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낭패와 꼬임은 바로 이러한 순서의 뒤바뀜 결과가 아닐까요? ‘살리기’로부터 삶을 시작하면 ‘살이’이는 저절로 되는 법일 텐데, ‘살리기’ 없이 ‘살려고’만 하니 일이 제대로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문을 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미련함’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요? 최근, 북한에서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 독점권 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초강수를 둔 것은 지금까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기 위한 해법이 보이지 않자 북한이 주목을 끌기 위해 현대의 사업 독점권 취소를 결정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 문제에 관한 한 한 번도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희망적인 소식은 없었던 터라, 충격적이기 보단 일상적인 소식으로 받아드려 집니다. 뭔가 발상의 전환이나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이러한 대결과 긴장은 지속될 거란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똑똑한 사람들의 분석과 전망 그리고 비평은 난무하지만, 남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남북관계가 이토록 파탄지경에 오기까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논리의 부재도 아니고 정책의 부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통일에 대한 의지와 철학의 부재였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수원에서 작은 통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하루 100원씩 기금을 모으자는 운동입니다. 통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하자는 취지입니다. 남북관계의 파탄에 대한 책임공방 속에서 무책임하게 방치되는 남북관계를 보고만 있는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역사와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는 기분입니다. 통일을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출발점에 다시 서고자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모으는 운동인 셈입니다. 이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살림살이’를 실천하려는 움직임입니다.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문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상식을 삶 속에서 실천해 보려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통일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일 것입니다. /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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