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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박물관, ‘문화적으로’ 풀자

〔문화/하다말다〕 기술적 인간, 문화적 인간

벼리 | 기사입력 2006/08/02 [23:17]

시립박물관, ‘문화적으로’ 풀자

〔문화/하다말다〕 기술적 인간, 문화적 인간

벼리 | 입력 : 2006/08/02 [23:17]

최근의 사회상황을 염두에 두면 ‘기술적 인간’과 ‘문화적 인간’이라는 두 가지 인간유형을 추출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두 유형적인 인간의 지칭은 과학자나 엔지니어 또는 배부르고 등 따스해 여유로 뮤지컬을 즐기는 부르조아적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술적 인간은 삶에서 하나의 결론이나 결정을 내리고 이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주기를 원하는 인간유형이다. 반면 기술적 인간의 독재적이고 과정생략적인 그 ‘위험성’을 직시하면서 마치 일년 농사를 지어가는 농부가 그러하듯 성실하게 삶을 ‘경작’하며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창조하는 인간유형이다.

▲ 성남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아트뷰》 7월호. 시립박물관을 공연예술박물관으로 가겠다는 내용의 ‘speciail interview 성남시장 이대엽’이 실려 있다.     © 성남투데이

기술적 인간은 이른바 ‘기술왕국’-과학과 기술을 결합한 기술운용체제에 권력이 집중된 사회체제-이라는 최근의 사회상황에 인간이 동물적으로, 즉물적으로 대응한 결과다. 기술왕국에서는 기술왕국의 실질적 주인으로 등장한 과학자, 기술자, 권력자뿐만 아니라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사회의 대다수 인간들도 기술적 인간이 된다. 이것이 내 두려움이다.

과학이나 기술은 실질적인 결과를 전제로 하는 탐구다. 성과를 중시하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써먹는 낡은 권력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똑 떨어진다. 단지 복잡하지 않고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술왕국에서는 하나의 결론, 결정이 하나 뿐인 진리, 정답으로 주장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이들이 기술왕국의 주역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어느 새 모두의 진리, 정답으로 탈바꿈한다. 기술왕국의 최고의 율법은 ‘편의주의’다. 이것이 내 두려움의 핵심이다.

기술왕국에서는 분분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견을 다는 인간들은 주둥이만 나불거린다고 매도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견이란, 분분한 의견이란 ‘절대’의 부인, ‘완성’의 부인일 수 있다. 주의하시라. 하나 뿐인 진리, 정답이란 철학적인 의미에서는 다양성의 부인 자체인 절대이며, 실천적인 의미에선 다른 대안 모색의 부인인 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기술왕국에서는 다양성의 부인이라는 점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개인, 바로 너의 부인이 불가피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 모색의 부인이라는 점에서 네가 피땀흘려 일구고 구하는 삶의 의미를 불가피하게 부인한다. 기술왕국은 너를 향해 너에게 강요한다. “결정한 대로 살아라, 노예처럼! 주어진 대로 살아라, 개나 돼지처럼!”

그러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의미를 묻는 존재다. 결코 하나 뿐인 진리, 정답에 주저앉지 않는다. 만족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삶이란 물음으로 떠나는 순례의 길일지 모른다.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물음에 “‘이것’이 부처다.”라는 답(?)이 나왔을 때 크게 깨우쳤다는 선의 문답이 있다. ‘이것’은 답이 없다 또는 무수한 답이 있을 수 있다는 은유다. 이 선문답은 삶의 의미를 물음 그 자체에서 구했다는 강력한 시사일 것이다.

인간은 동시에 자유를 추구한다. 역사, 현실이 인간의 자유를 억제해온 만큼 어떤 인간도 대적적인 태도를 감추지 않는다. 그만큼 역사, 현실은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술적 인간이 전면에 등장한 기술왕국은 그렇다. 역사와 현실에서 운동으로서, 실천으로서 저항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새로운 저항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적인 인간이란 기술적 인간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경고한다. 동시에 대안적인 삶, 삶의 대안적인 의미를 구하면서 그것을 다른 인간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농부처럼 경작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경작이 문화의 뜻이 아닌가. 은유적인 의미에서 경작이란 일군다는 뜻과 거둔다는 뜻이 있다. 문화적 인간이란 단지 삶의 의미를 일구면서 거두는 인간이다.

기술적 인간과 문화적 인간에 대한 이 같은 논의는 기술왕국 시대에 인간의 문제, 특히 개인의 문제가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 논의는 동시에 개개의 인간을 고찰하는 일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라는 공동체를 파악하는 일에서도 가치가 있다.

가령 성남지역사회를 기술적 인간이 이끌어간다고 상상해보자. 공동체의 파괴란 불을 보듯 뻔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아닌가.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바로 시립박물관을 공연예술박물관으로 가져가려는 성남문화재단, 이대엽 시장의 시도. 그것은 내가 보기에 기술적 인간들의 잔치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문화적이지 않다!

시립박물관을 공연예술박물관으로 가져가려는 성남문화재단, 이대엽 시장의 시도는 100% 성남적인 정체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시립박물관을 보는 내 사고의 핵심이다. 전문가들의 역할은 조언하는 것이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역할 전도’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 공연예술박물관이라는 배가 산으로 가는 오류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엔 문화재단이 성남지역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도 덧붙여질 수 있다..

나는 내 삶의 체험을 동해서 대한민국을, 한국사회를 망친 주범이 전문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성남시의 경우 시민의 봉사자인 공무원들이 지역주민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함께 정책을 수립한다기보다는 전문가집단에 맡기고 그 결과대로 움직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고 지역사회가 달라진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문화재단은 성남의 정체성을 무시했는지 모른다.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몰라서 그렇다면 그들은 열심히 지역사회를 배워야 하며, 의도적으로 그렇다면 그들은 매를 맞아야 한다. 그들은 이 둘 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문화재단은 성남의 정체성이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도 아니고 고립적으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의식이 낡았거나 진지하게 지역사회를 파고들어 그림 그려질 수 있고 손에 잡힐 수 있는 정체성의 순간들, 장면들, 의미들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둘 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문화재단이든, 시장이든 성남적인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할 박물관의 테마를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럴 권한도 주어지 않았다. 막대한 시민의 돈을 헛돈으로 날리고 두고두고 원망받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 문화란 기술적 인간이 제 멋대로 결정하고 ‘따를래, 말래’ 강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화는 문화적 인간에서 출발해야 한다. 모든 인간을 문화적 인간으로 대접하고 다양한 문화적 인간들의 동행을 통해서 서로 어울려 그 의미를 일구고 거두는 과정이다. 시립박물관문제를 이 같은 관점에서 원점에서 다시 풀어갈 것을, 동시에 지역사회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틀짜기에 나서줄 것을 이 시장에게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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