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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화 정원이 아닌 1공단 공원화를!

〔벼리의 돋보기〕도시의 혈류, 교환을 생각하며

벼리 | 기사입력 2008/11/04 [14:35]

초호화 정원이 아닌 1공단 공원화를!

〔벼리의 돋보기〕도시의 혈류, 교환을 생각하며

벼리 | 입력 : 2008/11/04 [14:35]
교환은 도시의 혈류다

농촌과 도시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의미에서 농촌이 폐쇄적인 곳이라면 도시는 개방적인 곳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농촌이 정체된 곳이라면 도시는 간단없이 흐르는 곳이다. 재화, 문화, 문명, 인간, 그리고 담론까지 그렇다. 농촌과 도시를 가르는 차이, 폐쇄와 개방 또는 정체와 흐름이라는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교환’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교환의 대상이 무엇이든 도시는 교환을 통해서만 도시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나는 교환이 있는 곳에서만 도시가 성립될 수 있고 도시로서 그 생명이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적절한 교환을 통해 도시가 도시로서 회전할 때, 그 주변인 농촌 역시 농촌으로서 회전할 수 있다고 본다. 도시가 도시다움으로써 그 주변인 농촌을 농촌답게 해주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다. 교환은 말하자면 사회를 사회이게 하는 ‘혈류’인 셈이다. 이것을 도시의 피의 법칙 나아가 사회의 피의 법칙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사회주의는 이미 부도 처리되었다. 또 ‘수정자본주의’라 부르든 내식으로 말하면 ‘의사사회주의’라 부르든 사회민주주의 역시 의심스럽다. 나는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위기를 봉합하는 일회용 구원투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것은 위기를 봉합하는 따라서 위기를 연장하는 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나를 지나치다고 욕해도 나는 이 의심을 버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내 눈에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도시인들을 사로잡는 것은 생태주의로 보인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그들의 모토다.

그러나 나는 생태주의는 대안이기는커녕 일종의 자위행위와 같은 것으로 본다. 아니 그것은 문제에 대적하지 않는 사실상 패배한 자들의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한다. 생태주의는 도시를 부정한다는 이유에서다. 생태주의자들은 재화의 낭비, 의식(인간)의 피폐화 같은 도시의 부정적 측면에 검약(자연으로부터의 최소한의 착취), 자연적 삶(낭만파적!)과 같은 농촌의 긍정적 측면을 대립시킨다. 그럴 듯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이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태도는 주어진 현실이자 대적해야 할 문제를 기피한다. 사회문제의 핵심인 도시를 관심 밖에 두는 것이며 결국 도시의 부정에 이르고 만다. 이는 곧 도시를 도시이게 하는 조건이자 동시에 농촌을 농촌이게 하는 조건인 교환 다름아닌 사회의 피를, 혈류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모토는 결국 게마인사프트(시민사회)에서 게젤샤프트(봉건적 공동체)로 역행하자는 모토가 되고 만다. 그러나 탈지구까지 말해지는 오늘 날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한가?

도시의 중요성을 사실(史實)로서 들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근대 유럽 즉 유럽의 게마인샤프트를 탄생시킨 ‘자유도시’를 들고 싶다. 유럽의 봉건시대 말기를 기준으로 유럽 도처에 산재한 자유도시들은 3,000개 이상에 이른다. 자유도시들은 종교개혁, 르네상스(재생), 시민혁명을 통해 유럽의 게마인샤프트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다. 게마인샤프트를 향한 역사운동을 꿈틀거리게 한 것이 바로 자유도시들의 혈류 즉 교환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계획주의는 위험하다

생태주의를 제외할 경우, 오늘날 도시의 혈류를 부정하는 또 다른 관점은 ‘계획주의’다. 사실은 지배적인 관점이다. 다양한 전문가집단들, 그리고 권력을 초월적 레벨에서 이해하는 권력자나 그런 권력의 지지자들이 이런 관점을 갖는다. 계획된 신도시, 도시계획, 경제계획 따위가 그런 관점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그런 경제계획의 경우를 보자. 가령 나는 지난 세기, 청년기에 충격 속에 목격한 사회주의의 붕괴에서 그 핵심적인 원인을 이 계획주의에서 구하는 입장이다. 정치적인 요인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왜 그들의 계획주의를 문제 삼을까?

계획주의는 사회 전체를 유리처럼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따라서 마음먹은 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태도,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그런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가 아닌 사회에 예정조화적 신을 도입하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따라서 신-인간이란 이 해괴한 환상의 질서는 사회에서 구조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든다. 그러나 신이 인간이 아닌 데 어떻게 인간을, 인간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일까?

사회주의에서 계획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공산당원들과 관료들이 포진한 사회주의정권을 ‘만능의 신’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자연생장적으로 흘러야 할 각종 교환 대상들의 부족과 과잉의 일상화, 이에 따른 사람들의 불안 그리고 사회주의적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필연적인 귀결. 이 점에서 계획주의는 시장만능주의의 쌍둥이일 뿐이다. 자유방임주의를 개척한 아담 스미스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경제를 지배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더구나 계획주의라는 것이 사회주의에서 실패한 실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런 계획주의가 도시계획, 경제계획 등 공공의 업무영역에서 되풀이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획주의에 사로잡힌 계획가들, 그리고 이런 계획가들을 방패삼아 초월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들,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는 어중이떠중이 지지자들이 있는 것이다. 무능력한 권력일수록 계획주의에 기댄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체제와 무관하게 경제의 예측과 계획은 대개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로 한없이 어려운 작업”(교토대 경제연구소장 사와타카미츠)이라는 말은 그래서 귀감이 된다. 아마 이 말은 인간, 인간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지닌 ‘불투명함’에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가수 김국환이 불렀나?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찌 남을 알겠느냐!).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인간의 사회는 그 누구도 ‘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기에!

도시도 그렇다. 가령 성남은 계획된 신도시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도시다. 누구나 동의한다. 이유는 딱 하나. 소위 계획가들이, 초월적 권력이던 박정희정권이 철거민의 도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는 중산층을 겨냥한 분당신도시, 판교신도시가 앞으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당신도시 입주 초기 도시계획을 전공한 어느 분당입주민이 내게 한날 한시에 건설된 분당신도시의 회색빛 암울한 미래에 마냥 푸념을 늘어놓던 일을.

▲ 구시가지가 망가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1공단 공원화. 그것은 구시가지 시민들의 넘치는 교환, 혈류를 만들어내는 획기적인 장이 될 수 있다. 사진은 수정구 신흥2동 1공단 부지 공장들에 대한 철거가 진행 중인 모습.     ©성남투데이

초호화 시청정원 대신 1공단을 시민공원으로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도시에는 언제나 계획이 놓치고 마는 교환 즉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성남은 분명 계획으로서는 실패한 신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동안은 계획이 담아내지 못한 활력이 있었다. 성남은 철거민 뿐 아니라 나처럼 어려서 집안이 경제적으로 망해 부모 손을 잡고 들어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전국 각처에서 들어왔다. 바로 이들이 계획이 담아내지 못한, ‘다양성’을 가진 활력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어내고 증식시켜 왔던 것이다.

내 판단은 결코 성남의 과거에 대한 미화가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지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이상의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남의 도시 이미지를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민도시’로 간직하고 있다. 성남의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증식시켜 온 사회적 관계들, 도시의 활력을 나는 일종의 리좀(rhizome) 즉 '다양체'로 이해한다. 계획이 아니라 계획을 넘어서고 마는 이런 다양체를 지금까지 성남을 도시로서 유지해온 비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구시가지는 지금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다. 내게 구시가지란 성남시라는 지리적 구역 위에 성립한 분당, 판교와 같은 또는 그 이상의 하나의 다양체다. 그것은 동시에 자체 내에 다양하고 유기적인 사회적 관계들로 연결된 하나의 중심이기도 하다. 분명 구시가지는 전만 못하다. 누구나 느낀다. 제2차 산업혁명 레벨에 있는 산업구조의 변동을 좇아가지 못하는 지역사회의 형편없는 능력 때문이다. 창조적인 인재들의 비상한 활동이 요구되는 이 도시에 반대로 형편없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비롯, 이대엽 시장과 같은 무능한 자들이 상전인양 한 통속을 이뤄 구시가지를 퇴락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본다.

구시가지의 붕괴로 치닫는 퇴락의 한 복판에 이 시장이 밀어붙인 성남시청 이전 및 초호화시청 신축이 있다. 분명하다. 그것은 도시의 혈류 즉 교환에 대한 정면 위배다. 도시계획 측면에서 그것은 하나의 초월적 중심에서 다른 중심이자 다양체인 구시가지 및 두 곳의 신시가지를 고정 배치시킬 뿐 아니라, 교환의 핵심 경제를 필두로 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혈류를 짓밟는 행정중심주의적 발상에 입각해 있다. 그것은 세 곳의 다른 다양체들이자 중심들을 압살하는 ‘신’이 되려는 것이다! 오죽하면 조선일보가 이례적인 사설까지 써가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낭비”의 극단적 사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을까!

앞으로 이대엽 시장은 성남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민선시장’으로 새겨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 주변을 초호화정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피크닉공원 및 화합의 광장 조성사업’이 그것이다. 토지 매입 및 공사비 포함해서 무려 910억 원의 시민혈세가 소요된다. 물론 그 초호화정원은 초호화시청이 그렇듯이 그 구상을 보니 ‘할리우드적 정원’임에 틀림없다. 영화보다 정치에서 ‘타고난 배우’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그에게 너무 잘 어울리지 않은가?

지금 이대엽 시장이 진행 중인 ‘2020년 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 작업의 핵심은 이 피크닉공원 및 화합의 광장 조성에 있다. 초호화시청 주변에 초호화정원을 조성하려는 문제의 성남동, 여수동 땅 19만여 평은 도시기본계획에 공원부지로 반영되지 않은 그린벨트지역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도시기본계획을 변경하고 그리고 그린벨트관리계획을 승인받으려고 목하 사바사바 작업 중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참 다행스러운 게 있다.

그것은 성남시의회가 얼마 전 열린 157회 임시회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는 필수 행정절차인 ‘지방의회 의견청취’ 자체를 보류시켰다는 점이다. 장대훈 도시건설위원장을 비롯한 도시건설위원들에게 늦게나마 경의를 표한다. 시의회의 보류는 행정적인 필수절차의 결여로 더 이상 용도변경을 위한 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의회가 언제 꺾일지 모른다는 우려는 남아 있다. 성남시청 이전 및 초호화시청 신축이 시의회의  ‘날치기 통과’로 이루어졌다는 나쁜 전례가 있어서다.

이대엽 시장은 결국 신축 중인 초호화시청 주변에 초호화정원을 조성하겠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막대한 시민혈세를 쓰겠다는 것이다. 막아야 한다. 그런 시민혈세가 있다면, 그것은 구시가지의 르네상스(재생)을 위해서 쓰여야만 정당성을 갖는다. 그런 시민혈세가 있다면, 1공단 공원화를 위해 쓰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다. 투기꾼이 사들인 땅을 시가 사들여, 그곳이 구시가지 시민의 삶 한복판에 자리잡은 시민공원으로 문화공간으로 쉬프트(shift)될 수 있도록 쓰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초호화시청 주변을 초호화정원으로 만들기 위해 공원부지로 용도변경하는 불온한 시도를 우선 막아야 한다. 동시에 공장부지로 묶여 있는 1공단을 투기꾼의 의도인 주거 및 상업용지가 아닌 공원부지로 용도변경하도록 지금 당장 시도해야 한다. 물론 시가 나서서 해야 한다. 공무원들도 정신차려야 한다. 시가 나서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요구하고 또 요구해야 한다. 이 시장이 버틴다면? 성남시민을 대한민국에서 치욕스럽게 만든 그의 친인척 소유 갈매기살단지 용도변경에 대한 주민소환운동이라도 일으켜 돌파해야 한다.

구시가지가 망가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1공단 공원화. 그것은 구시가지 시민들의 넘치는 교환, 혈류를 만들어내는 획기적인 장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힘과 지혜, 시민들의 활력있는 네트워킹은 이 도시의 혈류 중의 혈류일 것이다. 어떤 방패도 이 혈류를 막지 못한다. ‘공공적 이성인’인 시민이 나서야 한다. 시민들이 주체다. 다른 어떤 것도 시민을 대신할 수는 없다. 내가 믿는 것은 당파도, 그 어떤 조직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너무 낡았다. 시민들 사이의 교환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이것이 바로 진짜 게마인샤프트가 아니겠는가! 도시란 본디 그런 곳, 마땅히 그래야 한다. 

피가 흐르는 도시, 피가 차고 넘쳐 농촌으로 다른 도시로 흘러가는 도시를 원한다. 교환이라는 도시의 혈류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시대의 문제,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나는 나 자신을 믿고 있고, 내가 포함된 시민들을 믿는다. 이것이 전부. 나는 나로서, 시민으로서 1공단 시민공원화를 원하고 발언할 뿐이다. 나와 더불어 이 도시의 과거를 살아온 타자들, 내 자식 둘(내 막내아들은 유년 시절 마땅한 놀이터가 없어 골목을 오가는 차에 치여 다리에 큰 흉터를 안고 있다)을 포함한 미래의 타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런 염두는 전혀 거창한 이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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