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명제와 가치명제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시청이전은 사실이다’는 사실명제이며 ‘시청이전은 좋다’는 가치명제다. 사실명제는 ‘무엇이 어떻다’와 같은 사실진술에 해당되며 가치명제는 ‘좋다 나쁘다’, ‘찬성한다 반대한다’와 같은 가치진술에 해당된다.
사실의 문제는 그저 무엇이 있다고 하는 문제다. 거기에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사실의 문제는 누가 그 문제에 가치를 부여한다든가 없앤다든가 하는 또는 가치를 부여할 만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 사실과 가치의 무관함, 바로 사실명제와 가치명제의 결정적 차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실 자체’는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떠한 사실이든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만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물(物) 자체’ 또는 ‘선험적 대상’에 대해서 말한 것을 원용하면 사실 자체는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사실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느껴진 사실’이다. 사실이 나의 관심과 주의를 따라서 주관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바로 이 지점에서 어리석은 자들의 ‘착각’이 일어난다. 어떤 사실을 고려한다는 것을 가치평가할 만하다는 결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다.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사실이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사실이 느껴진 사실로서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사실의 문제가 가치의 문제로 둔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다름아닌 사실을 가지고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실명제가 가치명제를 수반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다. 가령 ‘시청이전은 사실이다’는 사실명제이며 ‘시청이전은 좋다’는 가치명제인데, 이 경우 시청이전은 사실이라는 사실명제를 시청이전은 좋다는 가치명제로 가정하는 것은 명백히 오류가 된다. 이런 오류를 누가 범하는가? 객관주의자들, 사실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객관성’을 내세우며 논거로서 ‘사실’을 제시한다. 이들은 모든 사실이 사실 자체가 아닌 느껴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객관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진 사실을 객관적이라고 우기고 교묘하게도 사실을 가치로 둔갑시킨다. 이것은 이중의 오류다. 이런 사례를,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인 사례를 한나라당 한성심 의원이 제공했다. 8일 그녀가 본회의장을 빌어 발언한 시청이전문제가 그것이다. 이날 그녀가 전한 메시지는 시청이전은 (기정)사실이라는 것,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것, 따라서 시청이전은 좋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그녀는 사실의 의미로서 시청이전 저지여론과 동떨어진 시청이전 추진경위를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이 추진경위에 “객관적인 말씀”이라고 우기고 “우리가 역사를 부인할 수 없듯이(시청이전 추진역사를 부인할 수 없다)”고 사실을 가치로 둔갑시켰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지자체와의 공사비, 청사면적도 비교, 거론했다. 따라서 그녀는 “시청이전은 기정사실”이라며 “더 이상 반대여론 확산과 소모적인 논쟁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정치판의 꼴불견이 야기되지 않도록 건설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밝혀 시청이전은 좋은 일이며 따라서 찬성할 일이라는 자의적인 결론을 도출, 제시했다. 한성심 의원의 메시지는 사실주의자, 객관주의자들의 이중의 오류, 사실을 객관적이라고 우기고 사실을 가치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객관성을 내세워 사실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호도하는 적나라한 사례다. 이 대엽 시장이나 한나라당이나 사람을 잘못 골랐다. 총대는 아무나 메는 게 아니다. 객관성을 너무나 사랑한(?) 그녀를 위해 ‘객관적인, 너무나 객관적인’ 조언 한 마디 들려주자. “한성심 의원,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요!”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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