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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정치’를 향한 위대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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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정치’를 향한 위대한 시작

〔벼리의 돋보기〕2008년 6월 10일

벼리 | 기사입력 2008/06/12 [02:00]

‘모두의 정치’를 향한 위대한 시작

〔벼리의 돋보기〕2008년 6월 10일

벼리 | 입력 : 2008/06/12 [02:00]
2008년 6월 10일. 손에 손에 촛불을 밝히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거리의 뿔난 시민들. 그 한 사람으로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쳤습니다. 옆에서 ‘엄마들이 뿔났다!’를 외치고 핏덩이 같은 아이들이 ‘아이들도 뿔났다!’고 외치는 데, 어찌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 포기 못해? ‘나’도 못해! 그런 거리, 그런 촛불들의 저항이었습니다. 어린 것들,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 대학생들에게 뒤질 새라 그들을 따라 들려오는 조롱의 노래들도 힘껏 따라 불렀습니다.

아주 특별하고 유쾌한 체험도 했지요. 거리 행진 중 남녀 젊은이들로 구성된 타악기 그룹이 들려주는 브라질 삼바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흔들고 두들기고 휘젓는 젊은이들의 신나는 율동, 음악과 함께 하는 목청껏 외치는 ‘이명박은 물러가라!’라니요. 또 걸음마다 얼마나 생기 있는 리듬감을 타는지요.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나는 거리축제에 한바탕 놀기 위해 촛불저항에 참여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지요.

뒤를 바짝 쫓아오는 대학생 시위대열에 밀려 부득이 그 타악기 그룹 옆에 붙어 행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이모자를 쓰고 있는 멤버. 그 모자에 쓰인 글귀가 눈에 화살처럼 꽂혔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짜릿한 전율이 온 몸을 휘돌았습니다. “정치는 몰라도 행복은 안다”니요!

▲ 2008년 6월 10일. 손에 손에 촛불을 밝히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거리의 뿔난 시민들. 그 한 사람으로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쳤습니다.     ©성남투데이

정치의 전부가 우리의 행복 추구에 있다는 것, 우리가 지금 분노하는 ‘그들만의 정치’는 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 그들만의 정치가 없어도 우리 스스로 행복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행복 추구가 가능한 정치는 어떤 정치일까? 하는 생각들에서죠. 순식간에 스쳐갔죠. 분명 저 타악기 그룹은 쏟아내는 신나는 율동과 음악을 통해 ‘정치는 몰라도 행복은 안다’고 발언하고 있고, 그들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은 분명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니까요.

아마 우리 스스로 행복 추구가 가능한 정치는 ‘모두의 정치’라 불릴 만한 정치일 겁니다. 모두가 참여해 모두가 토론하고 논쟁하며, 참여의 결과 모두가 공감하고 따르고 실천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둬들이는, 그런 정치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고전적인 명제가 뻥이 아니라면 모두의 정치는 실존적인 삶의 양식에 조건 지워진 인간의 자기실존을 실현하는 유일한 정치가 아닐까 합니다.

모두의 정치가 그들만의 정치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만 참여하고 우리야 듣던 말던 지들만 떠들다가 지들만 그 성과를 거둬들이는, 그런 정치가 그들만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권리를 남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대의민주주의는 대의하는 자와 대의되는 자로 인위적으로 분리했을 때만 성립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의제(擬制)에 불과하죠. 의제? ‘짜가민주주의’라는 겁니다.

정치는 몰라도 행복은 안다

현 사태의 원인은 ‘정치’에 있습니다. 선거로 이해되고, 신문과 방송에 난 대의하는 자의 얘기에 입방아나 찧던 그런 정치가 아니라 실존하는 내 삶을 짓이기는, 그런 정치로 그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음을 누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법도 정치에 있습니다. 더구나 촛불저항은 대의하던 자의 무능과 부재를 폭로하며 대신 대의되던 우리의 직접적인 참여와 토론, 논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해법으로 떠오를 정치는 모두의 정치를 지향하는 어떤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만의 정치를 대신할 모두의 정치 앞에, 그 문턱 앞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태의 진정한 해결은 내각 사퇴나 여야를 아우르는 개각 단행, 실정의 총책임자가 물러가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닐 겁니다. 설령 현재와 같은 대의민주주의의 기본틀을 용인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그것을 통제할 수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지금과 같은 국민적 저항은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정치가 그들만의 정치가 아니듯 ‘혁명’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혁명은 두 가지에 불과했습니다. 권력을 또 다른 권력으로 바꾸는 혁명이 하나, 상품미학에 기반한 광고에서 보듯 판타지로 전이된 혁명, 이 두 가지뿐입니다. 물론 후자는 혁명의 희화화일 뿐, 실제 혁명과는 전혀 무관하지요. 그러나 후자가 두 가지 혁명의 하나인 것은 혁명의 희화화의 모태가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혁명은 그 획기적인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폭력을 동반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력이 등장하기도 했고 설령 무혈혁명이라 해도 합법적이거나 관행적인 기존틀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죠. 이 점에서 모든 혁명은 폭력입니다. 더구나 폭력적인 혁명이 일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외 없는 인류적 체험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는 하는 구분은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하지요.

그들만의 정치도 아닌 혁명도 아닌

그들만의 정치를 대체하면서 동시에 혁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두의 정치는 새로운 정치 실험이 됩니다. 그들만의 정치로부터의 완강한 기득권 옹호나 저항 동시에 가장 획기적이라는 혁명의 유혹도 피해야 한다는 점에서죠. 따라서 비록 이 실험이 시대적인 요구로 제출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 실천은 매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의 실험이라는 시대적인 요구와 관련해 염두에 둘 수 있는 현재와 현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좌절보다는 낙관을 심어 줍니다.

지금 촛불저항이 새로운 세대에 촉발되어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전 계층적인 참여로 나타나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의제, 그 정체에서 짜가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지금 우리가 체험하고 있고 공감하고 있고, 일상적으로, 제도적으로 확장하고 싶은, 그런 현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자로서, 그 행사자로서 직접 정치의 장에 등장해 주장하고 논쟁하고, 우열을 가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현실은 분명 공화적인 것입니다. 진짜민주주의입니다.

더구나 이 진짜민주주의는 비폭력이라는 놀라운 힘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짜가민주주의임이 폭로된 그들만의 정치에 비폭력으로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명박산성으로 조롱받은 바리게이트를 치는 것에서 보듯 신성한 주권자를 데모꾼이나 폭도로 상정하지 않으면 설치 불가능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누군가는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보다 20여년 진화한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그 힘의 원천은 도덕입니다.

주장, 토론과 논쟁을 통해 누구나 공감하고 따라서 누구나 따르고 실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힘은 도덕 이외는 달리 이해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상이나 이념, 조직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 도덕적인 힘은 주권자적 차원의 저항과 함께 주장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공화적인 정치의 장에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상, 이념, 조직 따위를 내세우는 그들만의 정치가 전혀 알지 못한 힘, 위대한 힘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만의 정치를 꿰뚫어보는 도도한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이명박 물러가라를 외친다고 해서 도덕으로 무장된 촛불저항이 정권 타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권 타도와 결부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용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세력도 실은 없습니다. 그것은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 모델에 입각한 그런 움직임, 그런 목소리는 없습니다. 설령 어딘가에 있다 해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 도덕적인 힘은 오직 그들만의 정치에서 야기된 현재의 위기를 해소할 뿐 아니라 그들만의 정치 대신 모두의 정치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만 작용할 겁니다.

공화주의, 비폭력, 도덕의 삼각관계

문제는 그들만의 정치 대신 모두의 정치로, 짜가민주주의에서 진짜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설령 촛불저항에 함께 했다 해도 기성세대는 타협할 우려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느닷없이 찾아든 공화적인 정치의 장에서 체험한 도덕적 힘에 비해 훨씬 큰 일상화된 의지나 의식의 힘이 우선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의 정치가 봉착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화적인 요소를 도입할 거냐보다 기성세대가 그것을 얼마나 요구할지 회의가 든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진보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과거’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 그들의 담론은 사태의 꽁무니나 뒤따라가기에 바쁩니다. 새로운 세대가 촉발한 촛불저항을, 촛불저항을 촉발하고 그 흐름을 열정적으로 창조적으로 이어가는 새로운 세대를 80년대 민주화항쟁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습니다. 살아 있는 현실을 과거의 경험이나 관념으로 재단한다는 혐의가 짙습니다. 창조적 흐름을 복사에 불과한 재현에 가두려는 기성세대의 또 다른 단면이 아닌가 합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회의로부터 촛불저항이 새로운 세대로부터 촉발되었다는 점은 깊은 주목을 요합니다. 기성세대의 타협이라는 장애를 넘어설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촛불저항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그 열정적이며 창조적인 양상으로 보아 새로운 세대가 갖는 의미, 가치는 가히 ‘해독 불가능’ 수준입니다. 세대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이중성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점에서 이들은 불연속성이 과거 어떤 세대보다 도드라진 세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인 김지하가 11일자 경향신문 기고를 통해 말한 게 와 닿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젊은 아이들이 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네티즌과 블로거들의 판단은 전문가 이상이다. 완전히 열린 구조에서 쌍방향의 토론이 이뤄지는 이 새로운 체질을 보수세력은 감당하지 못한다. …나는 싸움꾼의 한 사람으로서 싸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기성세대 전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새로운 세대를 이명박 정권과 대항하는 수준에서 바라볼 수 없습니다. 기성세대 전체가 정신을 차리는 수준에서 바라봐도 벅찬, 분명 새로운 세대입니다. 이들은 촛불저항을 계기로 그들만의 정치를 대체할 모두의 정치를 실천적인 문제로 들고 나올 겁니다. 자신은 물론 동시대인의 현실적 삶의 질곡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촛불저항에서 드러난 자유롭고 상상적인 도덕적 힘의 흐름과 충돌하는 그들만의 정치에 깊은 대항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히 ‘신인류’입니다. 그것은 세대라는 의미, 한 세대라는 지칭의 의미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갚을 수 없는 부채로 기성세대에 작용할 겁니다.

신인류는 기성세대의 부채

새로운 저항이 창조되고 있습니다. 공화주의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새대가 열정적으로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갈 겁니다. 그들만의 정치 대신 혁명도 아닌 모두의 정치를 그리면서 그들 삶의 실존적 양식으로부터 정치 재구성의 길을 걸을 겁니다. 그들은 촛불저항을 통해 이미 시작했습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미래세대가 생겨서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이점에서 이들의 미래를 기성세대가 대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맡겨 놓아야 합니다.

이명박 물러가라 외치는 서울 한복판에서 뿔난 시민들에게 촛불을 건네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새로운 세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뿔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신인류와 함께 한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모두의 정치를 향한 위대한 시작입니다. 2008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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