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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섬이다. 자, 뛰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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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섬이다. 자, 뛰어보라!

〔벼리의 돋보기〕 어느 네티즌에 대한 단상

벼리 | 기사입력 2008/10/29 [23:15]

여기가 섬이다. 자, 뛰어보라!

〔벼리의 돋보기〕 어느 네티즌에 대한 단상

벼리 | 입력 : 2008/10/29 [23:15]
<무대보다 무대 옆 대기실이 흥미롭다>는 내가 쓴 글에 상당히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근래 보기 드문 일이다. 그 중 내가 단 댓글들도 역시 그 댓글들의 일부를 이룬다. 내가 다른 댓글을 다는 사람과 같은 지위에 내려앉는 것은 다른 댓글들에 대한 대응의 레벨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말하자면 상대화의 관점이다. 즉 나는 다른 작품이나 다른 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내 작품이나 나라는 저자에 대해서 결코 ‘작품의 독재’랄까, ‘저자의 독재’랄까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각각의 댓글이 갖는 의미 내지는 가치를 논외로 하면 댓글들은 정서적 반응양태에서 찬사와 비난으로 엇갈린다.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는 것 또는 글을 쓴다는 것은 비난에 노출되는 일이다. 이는 인터넷의 특성상 커뮤니케이션이 비폐쇄적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더구나 남이 뭐라 하든 눈 하나 꿈쩍이지 않고 작품의 독재를 구가하는 저자와는 다른 처신을 보였으니 비난이 더욱더 쏟아졌고 그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렇게 했고, 잘 했다고 생각한다. 실은 산다는 것 자체가 수치라고 믿고 사는 내가 아닌가.

비난하는 사람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성남시민’이라 하던가. 그는 내가 쓴 글을 어쩌면 그런 글을 쓴 나를 어떻게 해봐야겠다고 이른바 ‘작심한’ 사람으로 출현했다. 물론 그는 정면으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그럴 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제시하는 문제틀 속으로 따라서 자신이 제정한 규칙으로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 이는 전형적 독아론적 태도다. 다른 의미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뭔지에 대해서 전혀 이해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인식의 문제를 인식의 문제로 다루지 않을 때 그 두드러진 양상은 비인식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만다. 가령 누군가 예술작품을 미학적인 태도로 접근하지 않고 수집 취미나 경제적 계산법으로 접근하게 되면 그에게 예술작품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아니다. 이는 영화에서 악역을 연기한 사람을 영화 밖으로 끄집어내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문제를 문제로서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요청하는 필연적인 태도가 아닌 자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논의의 문제가 감정적 양상으로 치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작심하고 출현한 그는 결국 자신의 작심을 구현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시쳇말로 그는 내공이 딸린 것이다. 만약 그가 “더 이상의 댓글을 다는 것은 무의미해서”라는 일종의 자기변호로 자신을 위로하는 경우라면, 자신이 단 댓글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을 상대화해보라는 요청이다. 이렇게 하고도 얻는 게 없다면 나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는 근본적으로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인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왜 비난 일색으로, 결국에는 종적을 감추는 행태를 보였을까? 문제나 삶을 대하는 그의 독아론적 태도와도 관련이 있지만 이번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는 그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이해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탓이라고 이미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은 우선 그 자체보다 그것이 자신이 말함으로서 성립된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말하는 자가 있고 이에 응답하는 자가 있어야 비로소 커뮤니케이션은 성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하는 자는 응답하는 자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말하면 말하는 자는 대답할 수 있어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책임을 말한다. 이 책임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윤리적인 문제다. 즉 말하는 자는 책임이라는 윤리에 의해 동기지어진다. 이 동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고 응답을 부르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을 때 그것은 독백이 되고 만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무책임하게 말하는 자에 대해서 사회가 비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말하는 자로서, 이 점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법정까지 가는 일을 겪으면서도 이 점에 관한 한 도전받은 적은 없다.

말하는 자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가령 침묵도 하나의 대답이다) 말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내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떤 식으로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의 관점에서는 유한한 자유일 수밖에 없다. 즉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는 자유는 마음대로 지껄이는 방임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얼굴없는 익명의 나락에 빠져 비난과 매도를 일삼는 자들은 이 점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을 윤리의 관점이 아닌 교환의 관점에서도 말할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은 교환이다. 말하는 자와 응답하는 자의 교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환은 언제나 비대칭적이다. 말하는 자로서는 대답하는 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가 만약 대답하는 자가 자기 의도대로 답해준다고 가정하고 말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는 결코 말해선 안 될 사람이다. 그에게 대답하는 자는 동일시된 타자 즉 자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하는 자는 언제나 약자다.

이 점을 나는 한 시도 잊지 않는다. 상품이 교환되지 않으면 즉 화폐가 되지 않으면 그 상품은 폐기되고 만다. 아무라 잘 해도 땡처리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절망감을 낳거나 강한 심리적 강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내가 한 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은 이 강박과 무관하지 않다. 내 몸의 훼손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나는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 너무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말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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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늙는다는 것
  • 의회독재를 경계한다
  • 플라톤 왈, ‘나보다 못하는 거시기들’
  • 성남의 한계를 씹는다
  • 여기가 섬이다. 자, 뛰어보라!
  • 진정성이 있냐고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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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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