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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병원투쟁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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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병원투쟁 제안?

〔벼리의 돋보기〕차이 은폐하는 대립 아닌지

벼리 | 기사입력 2008/10/13 [21:04]

시립병원투쟁 제안?

〔벼리의 돋보기〕차이 은폐하는 대립 아닌지

벼리 | 입력 : 2008/10/13 [21:04]
성남투데이 게시판에 올라온 <시립병원 투쟁 하나를 제안한다>라는 제하의 글을 봤다. 게시판은 성남투데이의 안내문에 따르면 “자유로운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면서 “단, 인신공격 등으로 인한 삭제요청의 글, 광고성 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글이 현재 계시 중인 것으로 봐서는 현 시점에서는 그의 ‘자유로운 의견’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게시자의 네임은 <당당당>(그냥 느낌인데, 이 네임은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무대로 한 그 총잡이영화의 오래되고 다소 상투적인 이미지와 함께 귓전에 남은 ‘탕탕탕’이라는 약간은 유치한 총성처럼 들린다). 우선 당당당이 주장한 것을 ‘오해없이’ 정리해 소개한 다음 그 주장한 바에 대해 나 역시 ‘자유로운 의견’을 덧붙여 볼까 한다. 어떤 차이가 발견되고 그 차이를 그냥 흘려보내선 안 되겠다고 봤기 때문이다. 비교해서 보면 좋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시립병원 부지를 변경하려는 정치적 음모(?)에 앞장서는 시의원”, “A시의원, B시의원, C시의원”에 대해 “현수막을 제작하여 성남시청 성남초등학교사거리 중원구청사거리에 부착”할 뿐 아니라 “성남시립병원운동본부 소속 단체의 명의로 현수막 1개씩을 만들어 수정구 중원구 전 동에 플랭카드를 게재”하는 “현수막정치”를 전개하자는 것이다. 또 “시의원 지역구에 홍보물 2만장씩을 매일 배포하는 것”도, 끝으로 “주민소환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어떤 ‘동일시’를 전제한다. 그는 밝히고 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시립병원 설립을 반대했던 7명의 시의원 전원이 낙선한 바 있다”, “시립병원설립운동본부의 기풍은 시립병원 설립을 방해하는 정치인에게는 응당의 책임을 물어 왔다”. 즉 그는 A, B, C시의원을 지난 4대 시의회 당시 시립병원 설립을 반대했다는 그 7명의 시의원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앞서 분명히 한 대로 오해없이 그의 주장을 정리해 소개했다고 믿는다. 이렇게 읽고 보니 그의 주장에선 논리상의 구조적 특징이 드러난다. 세 명의 시의원에 대한 현수막정치 즉 대립은 동일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질문. 지금의 5대 시의회에 속한 세 명의 시의원은 4대 시의회 당시 응당의 책임을 물었다는 그 시의원과 과연 동일시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그가 현수막정치의 근거로서 밝힌 “시립병원 부지를 변경하려는 정치적 음모(?)에 앞장서는 시의원”은 ‘시립병원 설립을 방해하는 시의원’과는 명확히 표현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 또한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의미의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이런 표현의 차이에 대한 의문과 관련해 어떤 이유도 밝히고 있지 않다. 이것은 혹시 그의 주장이 관철되기 위해 필수조건이라 할 설득력의 부재는 아닐까?

이런 의문과 관련해서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나의 의문은 문자 그러니까 표현의 차이만을 문제삼을 뿐 표현의 차이야 어찌되었든 의미만 통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철저히 배격하는 관점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른바 ‘이심전심(以心傳心)’은 같은 부류 즉 패거리든 당파든 뭐든 그것이 어떤 특정한 정서든 이데올로기든 믿음이든 이런 동일성을 전제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와 다른 ‘어’를 ‘아’로 들을 수 있는 공동체는, 그러나 나처럼 ‘아’와 ‘어’를 소리든 의미든 분명히 구분하는 사람 즉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얼마든지 배척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시립병원 설립을 ‘간절히’ 바라는 성남시민의 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덧붙이자면 게시판은 표현에 규제된 이해만이 가능한 글쓰기의 장소이지 이심전심으로 들을 수 있는 말하기의 장소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의 주장 중에 나오는 ‘정치적 음모’라는 것도 그 의미가 불투명하다. 이것은 자의적인 풀이가 아니라 그의 표현에 정직하게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적 음모라는 표현에 놀라웁게도 물음표(?)(^^)를 붙였기 때문이다. 이 물음표로부터는 어떤 의미도 도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물음표를 받아들이는 내 관점에서는 정치적 음모라는 의미를 그는 전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 물음표로 인해 그는 발화 즉시 스스로 그 의미를 부인한 격이 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이런 엄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일시에선 현실감을 갖고 밝히자면 일종의 정치적 맥락이긴 하지만 해당 시의원들에게는 ‘협박’이랄까 ‘위협’이랄까 그런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이 점을 주목하고 싶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시립병원설립을 반대했던 7명의 시의원 전원이 낙선한 바 있다” 운운은 시립병원 부지를 변경하려는 시의원들에게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시사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뉘앙스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그의 동일시가 방법적으로 일종의 ‘풍자(諷刺)’라는 것이다. 풍자란? 암스테르담 출신의 안경알 세공 장인이자 철학자인 스피노자는 말한 바 있다. “조소하고 멸시하거나 저주하는” 것이며 “한층 더 날카롭게 비난할 줄 아는 사람은 신처럼 여겨지는” 그것이라고. 따라서 한편에선 손 쉽고 다른 한편에선 불 구경이 그렇듯 재미를 유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태를 들여다보는 데서 이런 비속한 풍자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선, 면, 입체를 다루는 방식” 즉 ‘기하학적 방법’이다.

당당당의 주장과 같은 경우를 염두에 두고 지금 새롭게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시립병원 설립문제를 직시할 때, 이 기하학적 방법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정의(定義)와 공리(公理) 두 측면으로 나눠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싶다. 이것은 당당당의 자유로운 의견과 비교해보고 싶은 나의 ‘자유로운 의견’이기도 하다(정치적 존재이자 또한 윤리적 존재인 인간에게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 (자아의 관점이 아닌) 사유자의 관점(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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