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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까

〔벼리의 돋보기〕이명박, 익명 그리고 언론의 자유

벼리 | 기사입력 2008/07/14 [14:52]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까

〔벼리의 돋보기〕이명박, 익명 그리고 언론의 자유

벼리 | 입력 : 2008/07/14 [14:52]
‘언론의 자유’는 언론만의 자유 곧 언론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만의 자유가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나 언론인만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언론사나 언론인들이 설쳐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최근 높아져 가는 조중동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나 정권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거나 남의 약점을 잡아 등쳐먹고 사는 사이비기자들에 대한 사회적 지탄은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의 자유란 실은 헌법에도 잘 나와 있듯이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 개념에 속한다. 그것은 누구나 연설 또는 신문이나 연극·영화·문학·음악·미술 등 각종 예술형식 등을 통해 나아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인터넷을 통해 자기의 생각을 제한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 제한받는 자유는 자유의 본성에서 어긋난다. 바로 이 점에서 규범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누구에게나 언론의 자유는 주어져 있는 셈이다.

▲ 11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통해 인터넷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을 드러냈다. “부정확한 정보를 확산시켜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정보전염병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사진출처;민중의 소리)     © 성남투데이

사유의 차원에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종의 근거는 무엇일까? 책임일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책임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격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인격을 따질 수 있는 고유한 이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인격이나 고유한 이름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인격은 동일한 것, 곧 영혼이라 부르든 자아라 부르든 그것은 하나가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격의 동일성’ 명제는 오류추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설파한 것이다. 인격이나 책임은 도덕적인 실천이나 그것이 불충분했을 때 등장하는 법적인 실천에서만 유효하다. 사실 인격이나 고유한 이름은 단지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의 사회생활을 위해 가정된 임시방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인격을 지웠을 때 고유한 이름을 지웠을 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종의 근거가 드러난다.

이 지움에 하나의 초월론적 형식 X라는 의미를 부여해 이 초월론적 X를 모든 경험, 모든 행위의 전제로 삼을 때다. 그것은 다름아닌 익명으로 언론하는 것이다. 마치 공(空)이 각종 형상들 즉 공간적 의미를 드러내듯이, 익명은 공과 같은 지위에서 공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익명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드러나지 않는 이름이지만 온갖 생각들을 드러내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월론적 X다.

실제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격을 갖지 않는다. 인격에 새겨진 각종 사회적 코드들을 벗어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터넷에선 누구나 성, 나이, 신분, 지위, 계급, 민족이나 인종 심지어 국가도 벗어난다. 인터넷은 그래서 인터넷(international network)이다. 내가 쓰고 있는 고유한 ID는 어떨까? 하나의 ID조차 실은 단수가 아니다. 얼마든지 지우고 바꿀 수 있는 ‘기의 없는 기호’에 불과할 뿐이다.

인터넷에선 탈사회적인 개인들만 존재한다. 개인의 정체성조차 모레퀄러(molecular), 멀티(multi), 하이드리드(hybrid)다. 익명의 보편성에서 언론의 자유가 나온다. 그리고 이 언론의 자유로 인해 오프라인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생각들이 제출되고 또 잘 소통이 된다. ‘모두의 정치’를 지향하는 촛불정치라는 획기적인 새로운 사회적 흐름 곁에는  전자 ‘아고라(agora)’가 있다. 아고라에서 보이는 귀중한 생각들과 그 사회적 소통은 좋은 사례다.

인간이 ‘인류’라고 말할 때 그 근거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에 있다. 그럼 인터넷에서 이루어진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선 코스모폴리탄들이 선두에 선다.’ 비록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상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한 자유가 있을까. 역사상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인터넷과 현실과의 융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익명성이 발휘하는 무궁한 힘이다.

물론 사람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등장할 때가 많다. 게다가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고, 인격의 동일성 명제에 휘둘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 이 익명을 모상(模相) 수준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생산과 창조가 아닌 구획과 파괴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비판이 아닌 비방, 논점 쟁론이 아닌 인신공격의 오류, 자유의 만끽이 아닌 방종의 구가, 근거없는 주장, 소통에 반하는 억지 부리기 등이 그 사례를 제공한다.

익명에서 비롯되는 언론의 자유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다. 딜레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나? 그럴 수는 없다. 그러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폐단들이 있다고 해서 익명, 익명에서 비롯되는 언론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통해 생산되는 의미와·가치 그리고 소통을 포기할 수는 없다. 딜레마는 딜레마다. 그러나 딜레마는 딜레마일 뿐이다. 매달려야 할 게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불가피한 것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11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통해 인터넷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을 드러냈다. “부정확한 정보를 확산시켜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정보전염병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 발언은 지난 5월 2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비판을 ‘광우병 괴담’으로 치부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의 생각이 언론의 자유가 지닌 양면성 중 실은 부정적 측면이 아닌 긍정적 측면을 겨냥하고 있고, 그것을 비튼 것임은 물론이다.

그는 인터넷상의 언론의 자유를, 언론의 자유에서 나오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생각들과 그 소통을 부정확한 정보요, 정보전염병으로 보는 것이다. 즉 불온하다고 모는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에 대한 ‘올드 마인드’를 가진 그가 인터넷 강박증에 걸려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인터넷과 정권의 관계에서 인터넷을 ‘불온’과 ‘음란’으로만 보는 것처럼 스스로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일은 없다. 또 아무리 정권의 통제적인 도구들을 동원한다 해도 감시는 불가능하다.

인터넷의 주역들은 기표에서뿐 아니라 기의에 있어서도 무수한 익명들이다. 이 익명들은 인터넷상의 언론의 자유가 지닌 양면성을 직시하고 있다. 경험에 대한 이성적 판단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잘 쓰자고 다짐도 하고 자정도 기울인다. 인터넷이 마치 잔디처럼 무궁히 뻗어나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터넷은 네트의 네트워크, 세계적인 네트워크다. 현실의 사회적 코드들로 인터넷을 어찌 해볼 방법은 없다. 그 주역들, 익명의 개인들은 마치 투명인간과 같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 잡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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