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Undefined index: HTTP_ACCEPT_ENCODING in /home/inswave/ins_news-UTF8-PHP7/sub_read.html on line 3
˝이제는 한반도가 흘린 피눈물을 씻어달라˝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야기:
로고

"이제는 한반도가 흘린 피눈물을 씻어달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야기

[정전협정 51주년 특별기고] 성공회대 김귀옥 교수

우리뉴스 | 기사입력 2004/07/27 [08:14]

"이제는 한반도가 흘린 피눈물을 씻어달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야기

[정전협정 51주년 특별기고] 성공회대 김귀옥 교수

우리뉴스 | 입력 : 2004/07/27 [08:14]
한반도에 총성이 그치는 날. 지금까지 나는 그날이 되면 산천초목도 춤추고 사람도 춤출거라고 막연히 기대해왔다. 2004년 6월 15일, 마침내 DMZ에 서로를 비방하던 목소리와 글씨가 사라지게 되었다.
 
대립과 전투를 일삼던 바다에서 남북 해군이 상호 교신을 하고 중국어선을 남북이 협동하여 감시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제 진정 한반도에 전쟁의 포성이 사라질 것인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정전은 한반도의 본격적인 냉전을 의미하였다. 아직 우리는 정전을 끝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남긴 상처로 아파하고 숨죽여 울었던가. 『죽음의 예비검속』의 저자인 이도영 박사는 예비검속 당시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 평생 방랑자의 삶을 살고 있다. 예비검속 때 어머니의 죽음을 맞게된 대구의 화가 이광달 선생 역시 아픔을 예술로 풀어낼 뿐이다.
 
그들의 아픔은 너무도 깊어 아직도 다 풀어낼 수 없지만 아직도 어떤 이들은, 적잖은 여성들은 전쟁 때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기는커녕 마치 자신이 무슨 범죄를 저지른 양, 가족들에게 조차 말하지 못한 채 '관에 들고 가겠다'며 기억을 애써 감추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아직도 말해지지 못한 이들의 전쟁의 아픔을 얘기하고 공감하며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그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서는 그들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태양아래 꺼내어야 한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야기를 세 할머니 이야기로 풀어나가 본다.
▲피카소가 우리나라 6.25전쟁을 고발한 그림인 <한국에서의 학살>1951.  그림출처/네이버 포토앨범     ©우리뉴스


 
할머니 1
 
이 이야기의 주인공 할머니 1, 문씨 할머니는 함경남도 출신으로 현재 일흔살을 막 넘겼으나 많이 아프다. 그에게는 '관에 갖고 들어갈 얘기'가 있다. 그는 인터뷰는커녕 나와의 만남조차도 거절하였다. 그의 기막힌 사연을 그를 납치한 한국전쟁 당시 북파공작원이었던 최씨 할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최씨 할아버지가 할머니 1을 잘 아는 것은 함경도 같은 고향 사람이기 때문이다.
 
1951년 5월경, 최씨가 원산 앞 바다에 있을 때 어느 섬에서 여맹원들이 회의를 하기 위해 한 집에 모두 모여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대장의 지휘에 따라 그를 포함한 5명은 야음을 틈타 그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은 자신의 옆 동네이기 때문에 손바닥 보듯 훤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신을 신은 채 동네처녀들이 있다는 방에 들이닥쳤다.
 
그 방에는 집주인인 듯한 남자가 있어서 저항하기에 그의 멱을 따 죽여버렸다. 동이 틀 무렵 여성들 4명을 끌고 해안가로 나와 타고 온 배로 섬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오인한 미 전투기의 공습을 받고 어이없게도 여성 한 명이 죽었다. 3명의 여성들은 두려움에 완전히 기가 질려 울지도 못했다.
 
그들은 여성들을 여도 본부로 넘겨주었다. 그 중 최씨의 소학교 동창이었던 문씨는 이아무 하사관에게 겁탈 당했다. 결국 문씨는 이 하사관과 정전이 될 때까지 여도에서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다른 여성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해주었고 밤에는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 정전이 되자 문씨는 원래 본처가 있었던 이 하사관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은 함경북도 앞 섬, 양도에서도 있었다. 당시 대원들은 성진 부근에 살고 있는 여성 2명을 납치해왔다. 그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늘 유격과 첩보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밥과 빨래하는 것을 싫어해 여성들에게 그런 일들을 다 맡겼다. 물론 밤에는 간부들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 2
 
할머니 2, 김씨 할머니는 1927년생으로 양양군 논산리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거기에서 산다. 그의 큰 아버지가 양양군수였다. 해방된 이듬해 그는 19살에 시집을 갔다. 남편 이상돈씨는 그보다 5살 위였고 소학교를 마치고 일제 강점기 때는 어업조합에서 말단 일을 했다. 속초읍내에 살던 양반집 큰 아들이었다. 그의 시아버지는 문자를 조금 알았던 것 같았다. 해방되기 전에는 속초가 읍이었으나 해방되고 나서는 면으로 되었다. 그래서 면 인민위원회가 생겼고 그에 따라 면사무소가 들어섰다. 시아버지는 면인민위원회에서 '인공정치'에 참여하면서 남편도 끌여들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원쑤놈의 남편은' 6·25가 일어나자 군대 지원 물자를 만들랴, 선전 격문을 쓰랴,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빠 얼굴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처음 인민군이 후퇴했을 때 면사무소의 물건을 챙긴 봇짐을 싸들고 '바로 올께'라는 말만 남기고 남편은 인민위원장, 내무서원들, 당원들과 같이 후퇴했다. 한 겨울 동지섣달 간난애를 데리고 시집에 있는데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단다. 하루는 반공청년단, 치안대들이 집에 찾아와 남편을 내놓으라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없는 남편을 어디서 찾나?'
 
그 길로 치안대들이 다른 집들로 갔다. 총성도 들렸으나 곧 잠잠했다. 그 악몽 같은 밤이 지나자 바람이 몹시 부는 이른 아침, 동네 사람 몇이 왔다. "--엄마, 소식 들었소, 간밤에 농민위원장이 총에 맞아 죽고, 조선소장이었던 박씨, 인민위원에서 일하던 고광식이, 이면우, 김진각이 모두 6명이 앞바다에 수장되었다우."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이 후퇴할 때는 원망스러웠지만, 죽을 자리를 피한 게 천행이라고... 아이 아버지가 살아 있기만을 바랬다.
 
같이 끌려갔던 총각이던 고광식은 요행히 수장을 면하고 돌아왔는데, 청년단들에게 또 다시 걸려 결국 군인 손에 총살당하고 말았다. 반공청년단들의 우두머리들은 8.15 나고 이남으로 도망쳤다가 1950년 10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인들의 힘을 믿고 빨갱이들을 처단하며 돌아다녔다. 이후 학살당한 가족들은 이후 내려온 인민군들이 다시 후퇴할 때 모두 (북으로)들어가고 말았다.
 
인민군이 다시 내려오고 들어갔으나 남편은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장질부사에 걸려 시름하던 그의 시아버지가 그해 초봄에 죽고 말자, 의지가지 없던 김씨 할머니는 간난애를 델고 시집 간지 4년만에 속초 논산 친정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잠못 이루는 밤은 친정으로 돌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편 잃은 서러움 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마다 국군들이 젊은 여성을 겁탈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으로 동네가 흉흉해 진 것이다. 그들은 낮이면 공비 소탕 작전임네, 뭐네 하면서 동네를 이 잡듯 샅샅히 뒤지며 돌아다녔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군부대가 인근에 있는 마을마다 처녀는 고사하고 과부들도 군인들에게 당했다. 과부는 모두 남편이 월북했으니 조사를 해야 한다나 뭐나 하며 말문을 막았다.
 
어느 날 밤, 김씨 친정집 마당에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옆에 누였던 간난 아들을 꽉안았다. 그 때 마침 안방에 불이 켜지더니, 친정아버지의 헛기침소리와 함께 "게, 방에 들어왔느냐"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그러기를 몇 번. 그러고 나서는 그의 집에 발길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동네 처녀는 3번 이상 겁탈을 당하고는 결국 그의 동네를 떠나고 말았다. 여러 번 당한 처녀들이 많았다. 얼굴이 고운 옥춘이는 당하는게 무서워 거지처럼, 미친년처럼 꾸미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군인들이 동네 처녀씨를 말린다고 했다.
 
그후 그는 동네 일에는 절대로 나서지 않았다. 피덩어리 하나 데리고 25년간 콩을 갈아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고 채소 농사 지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군수였던 큰 아버지가 키우던 소 13마리를 맡아키웠다. 애비없는 자식이 돈없는 서러움마저 당하지 않도록 억세게 일했다. 남자보다 더 억센 손, 거친 목소리의 김씨 할머니, 80살을 바라보는 노인이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으로 울먹였다.
 
할머니 3
 
할머니 3, 변씨 할머니는 왼팔이 없다. 모진 시대 모진 감옥살이를 하면서 걸린 동상으로 왼팔을 잘랐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인간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것에 치를 떨었고, 이생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돌이나 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빌었다. 할머니 3은 전남 장성군 출신인데, 해방되기 한 해전에 전북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해방 후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의 남편은 갑오농민전쟁의 후예로서 소위 '구빨치'였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게 되자 일제때 같이 항일운동을 했던 몇몇 동지들과 '야산대'가 되어 입산 투쟁을 하였다. 남편 없는 하늘 아래에서 그는 남편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믿으며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하나뿐인 어린 아들과도 언제 헤어질 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제대로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늘 냉정하게 대했다. 그는 그 사실이 두고두고 가슴에 걸려, 60살이 다된 아들에게 지금도 미안해한다.
 
6·25가 터지면서 그는 면 여맹위원장을 맡아 여성들의 문맹퇴치사업을 하고 의용군원호사업에 나섰다. 1950년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에 의한 9.27은 인민군과 좌익계열의 대후퇴를 맞게 되었고, 그도 같이 후퇴하였다. 당시 퇴로는 두 갈래로 북행이 아니면, 산행이었다. 그러나 한강 이남에서 북행은 어려웠다. 유엔군이 한반도를 가르면, 한편으로는 북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남진하였다. 국군이나 경찰도 같이 움직였다.
 
아군은 만나는 동네에서 '수복'이라는 이름과 함께 각종의 악명도 휘날렸다.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과 같은 대량학살사건뿐만 아니라 '빨갱이'를 처단한다는 미명 하에 그들의 유가족, 여자건 아이건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그런 소문은 그때 처음 있었던 게 아니다. 전쟁 전 구빨치때도 그랬다. 영광군에 있는 어떤 마을에서는 한 마을 여성들이 모두 성폭력을 당한 적도 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는 마을 어른, 아이들이 상당수 입산을 했다.
 
동네에 구빨치했다가 남편이 전쟁전에 아군들에게 처형을 당한 나 모씨라는 여성이 있었다. 급한 나머지 그는 아이들 네 명을 둔 채 입산했다가 그날로 그는 아이들이 너무 걱정되어 하산을 하려고 했다.
 
"'조금더 있다가 내려가라. 지금 내려가면 죽는다. 지금 막 군인들이 들어오는 판인데…' 그란디 내려가자마자 군인들이 죽였어요. 죽여갔고 길에다가 양 다리, 양 팔을 딱 벌여다가 거꾸로 매달려 자궁에 막대기가 꽉 박아서 죽였지."
 
적장을 효수(梟首)하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지만, 그와 같은 국군의 사적 처형은 '빨갱이'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표출한 결과로 보인다. 입산했던 어머니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하산하였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모멸과 수치심, 무법적인 처형뿐이었다. 현재는 5, 60대 노인이 되었을 그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평생 잊히지 않을 사건이었을 것이나,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을 오랫동안 억울하지만 수치스럽게 회고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흘린 피눈물이 한반도를 적셨다. 민주화시대가 되어 수 십년 된 아픔의 진실이 조금 밝혀지고 있으나, 아직도 그들은 상처와 두려움, 치욕감으로 가슴 조려하며 살고 있다. 그들의 피눈물이 언제나 깨끗이 씻겨질까?
 
 
*. 이 특별기고문은 민중의 소리(www.voiceofpeople.org)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 성남평화연대 “전쟁반대·평화실현 촉구” 기자회견
  • 희망찬 통일세상 경기통일마라톤대회 열려요~
  • “6·15시대를 다시 열기 위해 노력하자”
  • ‘위험한 핵발전!, 힘내라 일본인!’
  • 6·15경기본부, ‘군사훈련 반대 남북대화 촉구대회’ 개최
  • “한미연합사, 북침 전쟁연습 중단하라”
  • “한반도 평화, 국민의 힘에 달렸다”
  • 한반도 위기와 평화실현의 길은 ?
  • “대결을 넘어서 평화와 통일로~”
  • “한반도 긴장고조 전쟁책동 막아내야”
  • “한반도 평화와 통일시대 열어 나가야”
  • 어떤 전쟁도 평화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
  • 12월1일 2차 범국민행동에 집결해야
  • “범국민행동으로 세상을 바꾸자”
  • “국민이 나서면 세상은 변한다”
  • ‘남북관계발전 평화번영 선언’ 채택
  • 조국통일 염원을 통일쌀에 담아
  • "경의선 타고 통일을 열어요"
  • “경의선 타고 통일을 열어요”
  • “아프간 파병부대 즉각 철군하라”
  • 많이 본 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