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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우위의 사고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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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우위의 사고를 경계한다

[벼리의 돋보기] 강한 개인,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며

벼리 | 기사입력 2004/12/24 [00:27]

정치 우위의 사고를 경계한다

[벼리의 돋보기] 강한 개인,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며

벼리 | 입력 : 2004/12/24 [00:27]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그것이 개인적 수준이든 패거리의 수준이든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고 느낀다. 정치가 사회관계들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고가 바로 그것인데, 세력론으로 말하면 정치권력이 사회보다 더 강하다는 생각이다. 이 사고는 역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정당화해준다. 아마 지금까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돌이켜보면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에 거의 모든 정치권력이 변질의 길을 밟아왔다는 것은 송곳처럼 시사하는 바가 있다. 타락으로 점철된 모든 혁명의 역사가 특히 그렇다.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개인적 수준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던 혁명가가 종종 정반대의 모습 곧 전향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설 때인데, 이 때 우리는 얼마나 당혹스러웠던가! 이 때문에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 이에 기인한 정치권력 장악의 정당화 논리는 심각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는 물론 현실적인 뿌리가 있다. 실제 정치권력은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지배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상에만 주목하면 또 현상의존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한, 정치의 우위라는 제도적 현상과 이에 기인한 사고틀 역시 영원히 고착화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단언하지만 이 결론은 정치적 인간들에게만 적용된다. 적용부류가 한정되는 얘기인 것이다.
 
어떤 현실도 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현실도 늘 단일한 현상만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이견을 보이는 것은 현실에 내재된 차이에서 비롯되며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현실은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되고 다른 방향으로 바꿔낼 수 있다. 실제 정치적 인간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인간들에 비해서 덜 정치적이다. 그들은 정치적인 것보다 비정치적인 것에 더 많은 끈들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런 차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다수의 비정치적인 사람들은 민주주의 곧 주권재민의 원칙을 점점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중이다. 주권재민의 현실적 내용이 무엇인가. 정치권력이 다수의 비정치적인 사람들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 한 부분 역시 우위가 아닌 하위에 불과하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정치권력의 교체시기인 선거 때 보라. 어떤 후보자도 고개 숙이지 않는 자 없고, 머슴 아닌 상전이라고 어깨에 힘주는 자 없다. 이것이 바로 주권재민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권력은 본질에서 다수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런 정치권력이 눈깔이 뒤집혀서 상전에게 부당하게 털 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죽도록 팰 이유는 충분하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저항은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점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정치권력과 충돌을 빚는 것은 기존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일 때 만이다. 결단코 정치권력의 장악이 아니다. 정치권력의 장악에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우조차 본질적으로 정권 장악은 소수 정치적 인간들의 이른바 헤게모니 투쟁일 뿐이다.
 
기존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정치권력의 장악은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다수의 민주주의 곧 주권재민의 원칙에 기초하지만, 후자는 정치의 우위를 유일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소수 정치적 인간들의 믿음에 기초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혁명이나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정권 장악에 있다고 착각해왔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수의 비정치적인 사람들이 기존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정치권력 장악의 차이를 명쾌히 갈라서 볼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일이다.
 
민주주의가 충분히 몸에 배지 못한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학습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프로그램들을 작동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고유한 몫이다. 사회 도처에서 정치권력의 부당함에 자기 방식으로 언제든 맞짱 뜰 수 있는 강한 인간, 건강한 공동체를 길러내는 일이야말로 정치권력을 지금과 같은 정치 우위에서 사회의 한 부분이자 하위로 끌어내리는 지름길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회의 각 진지들이 추구해야 할 전략적 목표가 아니겠는가.
 
정치적인 인간들은 경계되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려는 저급한 자로부터 무사(無私)라는 신념과 양심을 가진 고급한 자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우위라는 유일불변의 진리 따라서 진리 아닌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정치권력을 부정하는 정치적 인간들의 정권 장악 시도에 부하뇌동하는 부정이 아니라 따라서 모든 정치적 인간들의 부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학습과 실천을 통해서 따라서 정치적 인간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비정치적인 다수는 그들과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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