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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 그리고 낙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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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 그리고 낙오자

[벼리의 돋보기] 시간에 딴지걸기

벼리 | 기사입력 2004/12/30 [04:27]

시간의 흐름, 그리고 낙오자

[벼리의 돋보기] 시간에 딴지걸기

벼리 | 입력 : 2004/12/30 [04:27]

하, 속절없어라! 한해가 저무는 이즘처럼 새삼 '시간'을 깊이 느끼는 때가 있을까. 세월을 어느 정도 견뎌온 사람들이라면 시간의 빠른 흐름에 두려움이나 허망함이 더욱 깊어지기도 하리라. 사람에 따라선 저무는 이즘 무슨 꿈을 꾸는 일 자체가 부담스럽거나 심지어 공염불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부터 앞서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고 마음이 편치 못하다.
▲마지막 붉은 감촉으로 온몸을 감싸는 황혼(광주 분원에서)     ©성남투데이

 
새삼 시간을 돌이켜 보게 된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볼 수도 없는 그것은, 다만 '흘러간다'는 점에서만 다수의 동의를 받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점조차, 마치 흐르는 물이 적지 않은 느낌들,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듯 단순하지만은 않다. 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빠르게 느리게 또는 여러 갈래인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의 똑같은 모양으로는 다가오지 않는 시간…….
 
반면 요즘 세상에 적용되고 있는 시간에 눈을 돌리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시간'일 뿐이다. 째깍째깍 시계를 따라 일분 60초, 하루 24시간, 한달 30일, 일년 365일……. 더구나 디지털시대에 들어서선 그 하나의 시간은 더욱더 빈틈없이 짜여져 있는 시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몸이 수용하는 체험이나 느낌과는 어딘가 다소 어긋나는 이 하나의 시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똑같은 시간일 뿐이다.

이 하나의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인 듯하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저 악명 높은 살인강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곧 '폭력'이 아닐까. 그리고 이 폭력은 실제 힘의 행사 이전에 그 자체로서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가공할만한 것이다. 사람들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폭력은 세련되기까지 하다. 디지털시대에 기계의 기능적 속도의 빠름을 경영과 일상생활에 적용하자고 주장한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그 누구도 하나의 시간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자신이 지닌 생리적 충동과 욕구, 천부의 자질을 발산하기는 어렵다. 이내 삶은 불구가 되고 자신은 노동자, 직장인, 상인, 사업가, 대중 또는 백수가 될 뿐이다. 개인의 창조적 가능성, 창조적인 개인은 용인되지 않는다.
 
다른 구석에서 하나의 시간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없지 않다. 가령 잘 알려진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관측자에 대해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고 제시, 이미 하나의 시간에 깊은 상처를 낸 바 있다. 인류학의 명저 《침묵의 언어》에서 에드워드 T. 홀은 시간의 취급방법이 문화마다 얼마나 다른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 철학자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도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러나 이런 저항의 목소리조차도 항상 어떤 코드주의에 포획된다. 그 코드주의가 어떤 종류의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의식을 몸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그 의식의 입맛에 따라 재배치의 구속을 감행하고 따라서 그 효과로서 모방의 무리를 만들어내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코드주의는 선동일 뿐이다. 선동가들은 누구인가? 많이 아는 자, 앞서 가는 자 소위 사회적 리더들, 그들을 경계할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실로 시간에 대한 체험에서 걸러지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다. 바로 자신, 자기 몸으로 느끼고 살피는 삶의 흐름 또는 순간들이다. 예컨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이켜보자. 그 여정에서 아름다운 시절 아니면 소중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 순간들을 떠올려 곱씹어보자. 아니면 지금 자신이 어떤 가치 있다고 믿는 일에 집중하는 경우 또는 어떤 망아(忘我)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고 가정해보자. 거기 과연 하나의 시간이 있을까. 그것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하나나 여럿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부재,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시간의 멈춤, 바로 그것이다. 바로 삶의 절정인 순간.
 
이 때문에 자기 삶에서 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남들이 빠르게 갈 때 또는 느리게 갈 때 "그건 아니야, 나랑 맞지 않아!"를 새기며 그와는 달리 갈 수 있는 선택, 책임 있는 선택 말이다. 하나 밖에, 한번 밖에 없는 삶에서 남의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맞출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선택은 그것이 능동적이라는 점에서 설령 무시가,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본질적으론 원하는 일이고 즐거움이 아닌가.
 
해가 저물고 있다. 한해가 저물고 있다. 다시 또 해는 떠오르고 새해는 시작되리라.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마냥 정신을 잃고 바라보는 저 황혼의 풍경은, 마지막 붉은 감촉으로 온몸을 감싸는 저 황혼의 풍경은 다신 맛볼 수 없으리라. 그리하여 외친다. 다시 한번! 이 강렬한 아쉬움 속에 시간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낙오한 자의 삶은 풍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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