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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증적 글쓰기, 그리고 의미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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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증적 글쓰기, 그리고 의미의 변주

[벼리의 돋보기〕글이 삶에 도달하기

벼리 | 기사입력 2005/01/01 [02:21]

편집증적 글쓰기, 그리고 의미의 변주

[벼리의 돋보기〕글이 삶에 도달하기

벼리 | 입력 : 2005/01/01 [02:21]

“의미가 다수가 아닌 그 어떤 사건, 현상, 말,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때로는 이것이고 때로는 저것이며, 때로는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에 따라서 더욱더 복잡한 어떤 것이다.”(질 들뢰즈)
 
가끔은 책을 읽는다. 드문드문. 신문은 안보지만, 이따금 프레시안이나 오마이뉴스, 성남투데이 같은 인터넷 뉴스미디어를 들어가기도 한다. 어쩌다가 거기 딸린 댓글들도 본다. 그러나 집착하는 법은 없다.
 
그 법이란 게 규칙과 당위의 의미라면 내 몸엔 그런 법이 처벌의 힘을 쓸만한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습관 탓인지 천성 탓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기억의 창고에 뭐 하나라도 쌓아두는 일도 없다. 다만 IQ로 백치는 아닌지라 어떤 인상이 종종 남는 경우는 있다.
 
오히려 어떤 것을 읽든 “에구, 씨발!”을 속으로 외치며 털어내는 일들도 있고, 흔하게는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다양하게, 다기하게 생각을 풀어가는 일들이 많다.
 
대체로 전자는 상투성, 기술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로 그 때마다 진짜 별볼일없는 조루증을 확인하는 까닭에 얄짤없이 털어내는 것이다. 후자는 “야, 맞장 한번 뜰래?”하며 튀어오르는 힘이 느껴지고 나로 하여금 살살 입질을 하게 하거나 덥석 물게끔 하는 경우다. 글읽기의 우선 멈춤, 그리고 몽상의 시작. 생각하기 곧 잠재적인 글쓰기.
 
후자의 스타일은 ‘글읽기’가 ‘글쓰기’로 레벨 이동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작가가 긋거나 손가락치기한 글자들을 따라 수동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뭐 빠지게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글자들의 여백과 틈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다른 글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가로지르기는, 설령 실제 표현된 글쓰기로 나아가지 않은 경우에도 독자에서 작가로 레벨 이동을 한 것이다.
 
이 점에서 글읽기를 그 자체로 완결짓는 태도는 경멸받을 만하다. 그가 작가라면 그는 개떼를 길들이는 자, 그가 독자라면 그는 길들여지는 개떼의 한 마리일 뿐이다. (그는 제 말을 할 수 있는 제 입을 가지고도 남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인 글읽기는 여럿인 글쓰기가 된다. 생각하기 곧 가로지르기를 통해 하나의 의미는 여럿의 의미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변주,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삶, 삶에서 구해진다.
 
그 삶의 모양, 삶의 흐름은 얼마나 복잡한가. 삶의 서로 다른 층위들, 그 복잡한 얽힘. 니체식으로 천 겹의 기원과 천 겹의 상태 그리고 천 개의 길들. 이런 삶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이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보다 더 풍부한 것은 삶이다. 누구도 삶을 딱 꼬집어서 ‘이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단정투의 말씨를 가진 사람을 조심할 것.)
 
그러나 현실에는 ‘이렇다’고 글쓰기하는 자들이 아주 많다. 여럿의 글쓰기가 아닌 하나의 글쓰기만을 고집하는 자들. 자연 여럿의 의미를, 의미의 변주를 보지 못하고 따라서 감당하지도 못한다. 글읽기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은 글쓰기에서, 생각하기에서, 글쓰기의 표현과 내용에서 습관적으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그것이 유치하든, 단순하든, 무색이든, 고상하든, 신처럼 하늘에서 굽어보든, 이런 하나의 글쓰기는 ‘편집증(偏執症)적 글쓰기’라 할 만하다.
 
편집증적 글쓰기는 한 방향으로만 치달리고, 한 자리에만 머무르려고 하고, 하나로 뭉치려고 하고, 한 덩어리로 쌓아두려고만 한다. 이미 있는,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형을 뒤쫓아가는 글쓰기, 속내없는 베껴쓰기.
 
반면 글읽기에서, 생각하기에서, 글쓰기의 그 표현과 내용에서, 그것이 설령 거칠거나 명시적이지 않은 경우들조차, 다양하게, 다기하게 움직이는 여럿인 글쓰기는 ‘분열증(分裂症)적 글쓰기’라 할 만하다.
 
분열증적 글쓰기는 여러 방향으로 달리거나 걷거나 쉬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달아나면서 힐끗 뒤돌아 곁눈질하고,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 복잡한 삶을 직시하고 이미 있는, 같은 삶은 정말 재미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다른 삶을 알고 있고, 다른 삶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저 혼자 풀어내는, 외로운 글쓰기.
 
이 때문에 분열증적 글쓰기는 생각하기, 글쓰기에서 가로지르기를 통해 교차하는 힘들을 느낀다. 그 힘들이 교차하는 어디쯤에서 기존의 알고 있던 이치를 낡았다는 이유에서 버리기도 하고 새로운 이치를 포착하기도 한다. 그 과정은 실존적인 삶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리하여 종종 몸으로 알게 되는 이치들은 굳이 형태적인 글쓰기에 갇히지 않는다. 글쓰기 밖 침묵의 경계로 넘어가기도 하며, 불가피한 삶의 트라우마(trauma)조차 벗할 수 있게 된다. 미끄러지겠지만, 글은 곧 삶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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