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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그리고 자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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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그리고 자연의 소리

[벼리의 돋보기]소리, 몸으로 듣는

벼리 | 기사입력 2005/01/03 [23:31]

목소리, 그리고 자연의 소리

[벼리의 돋보기]소리, 몸으로 듣는

벼리 | 입력 : 2005/01/03 [23:31]
어느 때부터인가 개인적으로 듣는 일에 관심이 많아졌다. 일상으로부터의 소리들,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들 특히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들에 대한 관심이 크다. 경계가 명료하거나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때를 맞아 귀를 활짝 열어두던 날이 있었다, 지난 겨울 남한산성에서.     © 성남투데이

같은 맥락에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어느 정도 생겨났고 전혀 소리와 무관한 듯 보이지만 소리와 연관해서 사고하는 일도 생겨났다. 이런 관심이 음악적인 견지에 선 창작자나 연주자의 입장과 매우 다른 것은 물론이다.
 
이 때문에 소리에 대한 관심은 일단은 음악적인 견지에서 소리나 음, 선율의 의미나 규칙을 따지는 일과는 무관하다. 음악적 문제 이전의 문제, 달리 말하면 원초적 본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의식의 지배가 익숙한 사람에게는 몸에 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하리라.
 
서구적인 사고는 귀와 입의 호응 따라서 청각과 목소리의 관계에 주로 주목하는 경향이지만 몸 밖 소리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귀는 훨씬 더 열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을 사회에 가두느냐 아니면 자연에까지 확장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사회에 한정해서 소리의 문제를 들여다볼 경우, 인간의 귀는 문명화 정도에 반비례해서 퇴보의 길을 밟아왔다. 일회적일 뿐만 아니라 흔적조차 남지 않는 타인의 목소리는 귀가 예민하지 않으면 놓치고 만다. 한번 놓치면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
 
오래된 고전들, 경전들, 어록들이 스승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예민한 귀를 가진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불경들이 그렇다.
 
평소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와 가치를 가슴 깊이 새기는 연습이 충분했으리라. 이 때 상호의존하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 휴머니티로 넘쳐 흘렀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때문에 가령 선가에 전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선지식의 목소리를 듣고 문득 깨닫는 ‘말 끝에 깨달음(言下便悟)’의 사례들은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귀의 의미와 가치가 기능적인 예민함 이상임을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삶이란 결코 사회에 갇히지 않는다. 자연에까지 확장된 삶만이 온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목소리에만 기울이는 귀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귀를 가진 이들은 문명사와 사상사를 통해 볼 때 대체로 자연에 대한 지배주의적 태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자연과 몸의 관계는 새롭게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 이른 아침 감나무에 날아와 우는 산새소리,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 싸륵싸륵 눈 내리는 소리……(요즘 집에서 귀 기울이는 소리들인데). 이런 자연의 소리들은 대체로 자연스럽다.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 소리들은 몸이 지닌, 그러나 잊고 있었거나 잃어버린 몸의 자연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의 소리가 그러한 것처럼 자연 그 자체는 어떠한 목적도 동기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주어진 인연대로 모이고 흩어지는 흐름만 보여줄 뿐이다. 인간의 삶도 진실로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삶의 본래성이 아닌가.
 
인간 삶의 자연적 기초가 제 몸에서 튼실해질수록 그에 대한 체인(體認)을 절감할수록 자연의 소리는 종종 무의미의 맛을 일깨워준다. 그 무의미의 맛이란 아마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至樂無樂)이라 간파한 장자의 그것과 무관치 않을 듯 싶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자연을 닮아가는 여정에서 자연의 소리와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는 짜릿한 순간이 있으리란 예감도 있게 되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악 쪽의 얘기이지만 "지금 듣는 음 다음에 무슨 음이 나올지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존 케이지의 말이 와닿는 것도, 어제 EBS에서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며 불확정적인 성격의 프리 뮤직(Free Music)의 소리들을 감명 깊게 들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득 가슴을 찌르는 그런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그런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 찾아나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내 귀가 닫혀 있는 것일까. 어디 고장이라도 난 것은 아닐까.
 
눈을 감으니 봄날이 그리워진다. 사람 흔적 별로 없는 골짜기에 파묻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와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그 아련한 봄날 말이다. 아니다. 이 겨울날에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때를 맞아 귀를 활짝 열어두는 일도 아주 좋은 일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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