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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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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몸으로

[벼리의 돋보기] 의식의 사기

벼리 | 기사입력 2005/01/07 [02:47]

의식에서 몸으로

[벼리의 돋보기] 의식의 사기

벼리 | 입력 : 2005/01/07 [02:47]
사람들은 의식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간은 의식적 존재란다. 사람이 개, 돼지와 다른 이유가 여기에서 구해진다나? 그런가? 그러나 이 믿음은 돋보기를 들이대면 결코 매끄럽지 않은 표면이 드러난다. 지배 받는 몸은 열등하다는 감춰진 하나의 전제가 금새 들통나는 것이다. 바로 몸을 우습게 여기는 따라서 반인간적인 저의!
 
또 하나 들통나는 게 있다. 의식이 몸을 지배한다는 믿음을 충분히 줄 만큼 ‘의식이 명료한 것이냐?’하는 것이다. 헐, 의식은 결코 명료하지 않다. 프로이드가 가르쳐준 무의식은 또 다른 의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절제된 의식과는 달리 무의식이란 제멋대로 놀고, 길들여지지 않고, 통박 굴리기 어렵고, 가히 예측 불허의 의식 바로 그것이 아닌가. 본능, 충동과 연결되어 있기에.
 
게다가 프로이드에 따르면, 무의식은 의식과 더불어 그가 자아라고 부른 곳에서 동거한다. 이는 곧 의식이 명료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의 몸짓의 속내, 그 몸짓의 바닥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실제적인 체험의 의미가 다시 읽혀진다. 더 나아가 과연 그 몸짓의 속내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회의도 드는 것이다. 돋보기 덕에 이제 의식의 입지는 협소해졌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니다. 
 
의식은 의식되는 것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의식되는 것들, 그것이 주어진 인상이든, 주어진 일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든, 사상과 지식이든, 또는 도덕적 양심이든 의식되는 것의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이 점을 “의식은 최고의 법정이 아니라 전달수단에 불과하며, 교도활동이 아니라 교도의 한 기관에 불과하다”고 니체는 말했다. 의식이 의식되는 것의 전달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은 의식의 의식되는 것에 대한 의존관계를 드러내준다. 의존관계라니?
 
니체는 “의식은 어떤 (열등한) 전체가 어떤 우월한 전체에 종속되길 원할 때만 습관적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탄생한다”고 말했다. 들뢰즈는 이런 니체의 생각을 “의식의 노예성”이라고 요약했다. 개인적 수준이든, 집단적 수준이든 특정한 사상지식에 의한 의식화 이른바 세뇌의 해악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의 노예성! 이것이 바로 의식의 마지막 남은 흉한 몰골이다.
 
왜 돋보기를 들이대어 의식을 파헤치는가? 사람을 금수로 만들기 위해서? 사상지식의 무용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아니다. 한편에선 노예적인 의식이 지나치게 사람 자체를 부리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다. 진실로 그러하다.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의식적이다. 다른 한편에선 의식이 외면하고 돌보지 않아 고아로 전락된 몸을 회복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몸으로 아는 의식, 몸과 분리되지 않는 의식, 몸으로 새긴 의식을 만들고자 함이다.
 
몸이 생산하지 않은 것, 단지 내 몸을 처소로 빌었을 뿐 내 몸 밖으로부터 온 것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새길 수 없는 것, 기억되는 것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의 것. 남의 것을 내 몸의 주인으로 삼다니! 그 따위 것들은 그저 보잘 것 없는 전달의 수단, 도구일 뿐이다. 내 것은 오직 내 몸 뿐이다. “내 몸은 나의 전부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영혼이란 몸의 어떤 면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니체는 말했다. 몸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몸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해서 몸의 방종과 안일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능, 충동과 연결된 무의식의 측면에서 ‘동물적’(이 표현은 단지 비유일 뿐 선악의 도덕과는 무관하다)이지만 인간인 한에서 ‘인간적’이다. 예컨대 인간이란 동물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이타적(이 표현 역시 비유일 뿐 선악의 도덕과는 무관하다)이다. 인간은 이 경계에서 숙명처럼 아찔한 줄타기를 한다.
 
풍덩 빠지는 순간 몸의 세계는 의식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몸을 체험한 자들은 말한다. 존재의 단순함, 간략함, 무한의 집중, 무한한 세계와의 연기(緣起). 그리하여 존재의 충만함, 극한으로 상승하는 평정. 어떻게 표현하든 이런 몸의 세계는 몸의 거듭남, 거듭난 몸이다. 게다가 그 거듭남은 한번 아닌 두 번, 세 번, 갈 수 있는 한 갈 데까지 간다. 탄생도 죽음도 없다. 몸의 흐름 만이 있을 뿐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노자가 간파했던가.
 
어떻게 몸의 세계에 빠질 수 있는가? 사람마다 몸이 다르니 어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란 최소한의 것이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의심하는 일이다. 의식으로 받아들인, 몸 밖에서 온 의식된 것들을 몸으로 의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의식과 의식된 것들이 몸을 우습게 아는 줄 깨닫는다면! 명료치 않은 의식의 가당치 않는 몸의 지배를 깨닫는다면! 의식을 몸 아래에 두고 부릴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몸의 위대한 자유!
 
가다 보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걸려 심한 몸앓이도 하게 되리라. 하긴 애씀이 없는 얻음이 어디 있으랴. 참을성이 있는 경우, 의식이 끊어지는 경계에까지 나아가리라.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다면, 그 경계의 벼랑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몸의 세계가 하나의 ‘작업장’이며 ‘놀이터’임을 절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 것임을 절감할 수 있다면! 바로 제 몸,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일은 ‘몸 보여주기’에 바쁜 현실, 바로 몸의 외관을 중시하는 현실, 나아가 목숨을 경시하는 현실을 단박에 꿰뚫어볼 수 있는 효과도 있다. 다이어트, 천박한 웰빙바람, 몸 사치의 외관들, 권력이란 치장, 자살사이트, 돈을 겨냥한 상해 등등. 의식의 몸 지배가 이런 엿 같은 현실을 조장하고 있음을 몸으로 체득하고 발언할 수 있는 몸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몸을 절감하는 자 존재의 근거, 그것의 가치를 몸으로 말할지니! 이를 위해 그 어떤 믿음들과는 전혀 다른 믿음이 필요하리라. 그것은 인간의 믿음 가운데 최고의 것! 몸으로부터 기원(起源)한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에서. 뼈 속 깊이 새겨둘 것! 옛사람 임제(臨濟)의 말이다.
 
‘남에게 속지마!’(不受人惑')
‘믿어, 자신을!’(自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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