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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사시'한 봄날이 오지 않을지라도

[벼리의 돋보기] 식물들의 겨울나기

벼리 | 기사입력 2005/01/17 [23:42]

'뽀사시'한 봄날이 오지 않을지라도

[벼리의 돋보기] 식물들의 겨울나기

벼리 | 입력 : 2005/01/17 [23:42]
식물들은 ‘겨울나기’를 한다. 언듯 보기에 그것은 잔혹하다. 늦봄 꽃을 피우는 민들망초가 그렇다. 어제 도로변 절개지에서 그 놈은 로우젯형으로 땅바닥에 완전히 몸을 붙이고 있었다. 오한을 덜 타려는 이런 자세도 자세지만 그 놈의 몸은 온통 불덩이처럼 새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겨울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빨아들이려는 심사다.
 
민들망초가 자리잡은 곳은 사실상 황무지나 진배없다. 주변엔 그 놈의 겨울나기에 협력할 다른 식물들도 없고, 그 놈을 넉넉하게 덮어줄 마른 풀잎들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해 녹화용으로 심은 나무들이 떨군 낙엽들도 세찬 겨울바람에 어디론가 다 날아가버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올해는 겨울가뭄도 무척 심하다. 민들망초의 겨울나기는 한편의 잔혹극이다.
 
▲ 민들망초의 겨울나기는 한편의 잔혹극이다     © 2005 벼리

민들망초의 겨울나기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집 뒤 남한산 숲에 들어 나무의 겨울눈들을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아직도 봄이 멀었다는 기호였다. 층층나무도, 찔레도, 서어나무도, 산벗나무도 가지에서 튀어나온 토실한 눈이 아니라 가지에 새겨진 점이었다. 가장 먼저 남한산의 봄을 전하는 생강나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무들의 겨울나기 역시 잔혹했다.
 
산을 내려오다가 방학으로 조용해진 초등학교 울타리용 휀스에 말라 죽은 넝쿨에 눈이 갔다. 지난 해 어린것들에게 서정을 심어주었을 나팔꽃이었다. 여기저기 끊어진 그 넝쿨에 금이 갔지만 씨앗이 터져 나오지 않는 씨방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혹시 눈발이나 겨울의 비나 바람에 콘크리트 길바닥으로 떨어질까 얼른 따서 초등학교 화단으로 떨어뜨렸다.
 
집으로 돌아와 차나 마실까 물을 달이는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몇 해 전 이맘쯤 안면도에서 어린것들과 눈을 맞으며 소나무숲을 걷다가 새우란 군락을 만난 기억이 그것이다. 그 때 에비랍시고 어린것들에게 질경이잎처럼 생긴 새우란 잎이 땅바닥에 딱 붙어있는 이치와 쌓인 눈을 걷어내고 살짝 덮혀 있는 솔잎과 부엽토를 헤쳐 땅속의 눈을 보여주고는 어떻게 겨울나기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차를 마시며 의문을 던진다. 식물들의 겨울나기, 과연 생명의 성장이 멈춘 것일까? 식물들에게 겨울이란 단지 ‘나기’일 뿐일까? 대답은 금새 ‘아니다!’로 나왔다. 삶에서 체험한 것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을 따스하게, 따라서 식물의 관점에서 겨울을 편안하게 보낸 식물들은 봄에 꽃이 아름답지 않다. 난초를 비롯해 이런저런 화초들을 길러봐서 안다.
 
게다가 우리가 먹는 곡식의 종자들은 한결같이 곧바로 심지 않는다. 비교적 어둡고 차고 건조한 창고에 보관해두었다가 봄이 되어서야 심는다. 설령 비닐하우스에다 심는다고 해도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싹을 틔운다고 해도 실하게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홍성처가에서 많이 보고 겪은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들의 겨울나기는 단순한 겨울나기가 아니라 겨울과 벗삼은 겨울나기인 셈이다. 그것은 성장의 멈춤이 아니라 또 다른 성장 곧 내적 성장인 셈이다. 아마 뱀이나 곰의 동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밤에 잠을 자는 것은 단순한 휴지가 아니라 다음 날 낮에 온전하게 움직이기 위해 몸의 충실을 다지는 일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런 겨울나기, 동면, 잠 등속은 단순한 생명의 휴지가 아니라 어떤 고유한 생명운동으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식물의 겨울나기는 잔혹극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활동과는 달리 고독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는 자기성찰과 닮았다고 느낀다. 겨울은 오행 가운데 물로 표상(表象)된다. 물은 속으로 스며드는 성질이 있다. 그런 물처럼 사람도 자기로 스며들어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처럼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성찰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힘겨운 싸움이다.

그러나 그 성찰의 결과는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헛되지 않으리라. 과정이 튼실하기 때문이다.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선 자기성찰의 과정과 자기성찰의 결과가 분리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성찰적인 사람에겐 척도가 자기에게 있지 바깥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의 겨울나기처럼 고독하고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을 견뎌내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소설 쓰는 이인성씨가 여러 해 전 말한 것을 빌리면 ‘식물성의 저항’일 것이다.
 
설령 자신에게, 당대에 ‘뽀사시’한 봄날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식물의 겨울나기를 들여다본 사람은 내일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다. 그 자체로 아주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모진 저항을 수행하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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