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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출발, 부부

[벼리의 돋보기] 음양, 그 둘의 논리

벼리 | 기사입력 2005/01/25 [01:01]

세상의 출발, 부부

[벼리의 돋보기] 음양, 그 둘의 논리

벼리 | 입력 : 2005/01/25 [01:01]
그는 남자다. 남자로 태어났고 남자로 자라났으며 남자로 살아왔고 끝내 남자로 죽을 것이다. 이런 남자로서의 삶을 그는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도 일단 일을 할 때는 굳세게 일어나는(其靜也專 其動也直, 周易)" 건(乾) 곧 양(陽)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느낀다.
 
그는, 그러나 가끔은 여자가 되고 싶다. 그 순간만큼 그는 진지하다.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가 과연 있을까? 그는 그런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여자의 삶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는 그것을 의욕하는 것일까? 남자인 그에게 여자의 삶은 너머의 삶이 아닐까? 그가 살아보지 못한, 그 부재의 삶은 그에게 상처로, 동경으로 다가온다.
 
대개의 사내들이 그러하듯 그도 상처를 준 여자들이 있었다. 자신 말고도 다른 사내들에 의해 상처를 받은 여자들은 또 얼마나 있어왔는가. 아내, 어머니, 누이, 여자친구, 헤어진 애인, 친구의 헤어진 아내, 술집여자, 창녀…….
 
아프다. 여자의 상처는 그의 삶에 상처를 냈다. 여자의 상처가 남자인 그의 상처가 된 것이다. 상처가 상처가 된 것이다. 여자의 상처는 그에게 상처로 자리잡은 지 오래된 듯하다. 그러자 그 상처를 끌어안으려는 연민이 일었고, 그 연민은 어느 새 여자의 상처 자체가 되고 싶은 의욕으로 변했다.
 
이 때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것을을 강하게 느꼈다. 그것은 이따금 여자의 삶에서 느끼곤 했던 부드러움, 섬세함, 배려, 보살핌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체험 속에서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없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다만 세상으로부터 남자로 길들여졌다는 이유에서 그런 것들이 쇠퇴되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자인 그는 "고요할 때는 닫혀 있다가도 움직일 때는 크게 열리는(其靜也翕 其動也闢, 周易)" 곤(坤) 곧 음(陰)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런 체험 때문에 그는 이따금 여자로 몸을 바꾸었으면 한다. 그는 여자가 되고 싶다.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내와 함께 해온 부부라는 삶이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에게 그것은 시간의 켜로는 다른 어떤 인간관계보다 훨씬 두텁고 그 시간의 켜가 펼치는 주름 역시 돌이키는 순간마다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다. 그는 남은 삶에도 부부의 인연이 다른 인연보다 가장 질긴 매듭임을 예감한다.
 
이런 체험으로 그는 부부가 영원히 하나가 되지 못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서로 다른 그 둘은 서로를 당기며 닮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부부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사회를 형성하는 인간 삶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그는 다른 인간관계들에 적용되는 어떤 원리들보다 부부, 그 둘의 논리가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이자 인간 삶의 원리라는 것을 안다.
 
그에게, 그러므로 부부관계에 부계사회의 원리를 적용하는 모든 시도들, 하다못해 모계사회의 원리를 적용하는 시도조차 음모이거나 사기로 간주된다. 이 점에서만큼은 오륜이라는 위계의 도덕이라든가, 부부관계를 깨는 한 어떠한 페미니즘도 그에게는 하찮게 보인다. 그는 말한다. 부부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위도 아래도 아니다, 다만 서로 마주하는 다른 둘일 뿐이라고.
 
그 둘은 애증 속에서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충하는 관계(相補)와 서로를 밀치고 끌어당기는 관계(對待)로 맺어지고 함께 나누는 삶을 만든다고 그는 믿는다. 서로 마주하는 다른 둘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부부의 존재원리, 인간 삶을 창조하는 생성원리, 그리하여 이 가장 기초적인 원리에 어떠한 위계나 어떠한 거짓의 이미지를 덧칠하는 자를 그는 음모가나 사기꾼으로 간주한다.
 
동시에 그는 부부관계가 자연 전체로 확대된다는 것도 안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많은 일들이 따지고 보면 결국 둘이 아닌 것이 없고, 다만 자연에는 사람은 사람식대로, 동물은 동물식대로, 식물은 식물식대로, 무생물은 무생물식대로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 역시 부부라는 그 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 둘의 논리를 통해 자연 역시 "낳고 낳고 또 낳는, 영원한 변화(生生之謂易, 周易)"가 있다고 그는 안다. 자연의 존재원리, 생성원리 역시 부부처럼 바로 그 둘의 논리에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신을 믿지 않으며, 신적인 것도 믿지 않으며, 신격화되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 자연을 만드는 음양 그 둘의 논리를 믿는다.
 
그런 그는 종종 증오보다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 사랑하지 못하는 아픔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부부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속으로 말한다. (사랑하자,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파하자…….) 그런 그가 다시 속으로 말한다. (삶이란, 삶에 의미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평범함 속에 있는 것이다, 부부처럼, 음양, 그 둘의 논리처럼…….)
 
*. 덧붙임 : 이 글을 정리하면서 그는 글의 헛됨을, 부질없음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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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회독재를 경계한다
  • 플라톤 왈, ‘나보다 못하는 거시기들’
  • 성남의 한계를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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