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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고프면 밥 먹어

[벼리의 돋보기]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굴리다가

벼리 | 기사입력 2005/02/02 [21:38]

배 고프면 밥 먹어

[벼리의 돋보기]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굴리다가

벼리 | 입력 : 2005/02/02 [21:38]
인간은 ‘문제 많은’ 삶 속에 놓여 있다. 이런 인간의 삶을 불교는 ‘연기(緣起)’의 눈으로 본다. 연기설(緣起說)은 불교를 관통해온 이치로 원시불교, 부파불교(소승불교), 대승불교를 거치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연기설은 그 이치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붓다가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말한 것도 그 어려움을 힘주어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연기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의 ‘방편’이 도입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십이연기설은 연기설을 추상적인 논리로 단순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언제든지 새는 날 수 있다. 새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산석취금(山石翠禽)’(부분)     © 2005 벼리
 
십이연기설을 구성하는 개념적 수단들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로 모두 열 두 가지다. 앞의 것은 원인 내지 조건이며 뒤의 것은 그 결과를 뜻한다. 곧 앞의 것이 원인 내지 조건이 되어 바로 뒤의 것을 결과로 일으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앞의 것과 뒤의 것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이 인과관계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열 두 가지 연쇄에서 나열된 순서대로 내려간다. 이 같은 열 두 가지 개념적 수단들, 그 인과관계의 내림차순에 따라 십이연기설을 풀면 아래와 같겠다.
 
어리석은 인간이(無明) 길들여진 생각, 타성화된 말과 행동을 통해(行) 분별심만 키우니(識) 비물질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 모두를(名色) 몸의 여섯 가지 기관(눈, 귀, 코, 혀, 몸, 사고)을 통해(六處) 느끼고 아는 것이다(觸). 이로부터 근심과 번뇌,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쾌락을 느껴(受) 삶에서 정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을 갈망하고(愛) 몸과 마음으로 집착하니(取) 그것들을 고정적인 실체로 표상한다(有). 이로부터 고뇌에 시달리는 삶, 잘못 사는 삶이 생겨나고(生) 생겨나므로 쇠퇴하고 없어진다(老死). 
 
이런 뜻으로 볼 때 십이연기설은 문제 많은 인간의 삶 곧 고뇌에 시달리는 삶, 잘못 사는  삶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이 십이연기설에 따라 일상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흐름을 비춰보면, 인간 삶은 마치 높은 산의 정상에 섰을 때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다. 이로부터 연기설은 다양한 삶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인간 삶의 윤회(輪廻)라는, 그 연쇄의 쇠사슬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연기설이 문제 많은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불교의 눈이 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문제 많은 삶에 끌려 가지만은 않는다. 고뇌에 시달리는 삶, 잘못 사는 삶에 그대로 실려 가지만은 않는다. 인간은 결코 반응적이지만 않다. 인간은 윤회의 쇠사슬에 얽매이고 시달리는 만큼이나, 그 체험의 강도만큼이나, 그에 비례해서 그것에 싫증을, 넌더리를 낸다. 그리하여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렬한 삶의 충동이 솟구친다. 그 솟구치는 강렬함이 윤회의 쇠사슬보다 강해지길 의욕할 때, 그리하여 그 강렬함이 윤회의 쇠사슬보다 강해짐을 느낄 때, 그 적극적인 힘은 불을 뿜는 용접기가 되어 윤회의 쇠사슬을 끊어낼 수도 있다. 삶은 반전이 필요하다. 새가 어찌 알에서 그냥 나오랴!
 
십이연기설이 윤회의 쇠사슬에 걸려든, 인간 삶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뇌에 시달리는 삶, 잘못 사는 삶을 파노라마로 펼쳐보임으로써 대체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설이 단순화된 연기설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이유이리라. 그것은 바로 인간 삶의 윤회의 쇠사슬을 끊어내려는 강력한 삶의 충동을 자극하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힌 죄수의 사진을 볼 때 우리가 직관적으로 그 정반대인 ‘자유’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에 놓여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십이연기설이라는 논리의 세계에서 그 한복판을 가로질러 균열을 내면서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직관의 세계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충격이다. 망치다. 이 망치의 동력은 물론 윤회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려는 강렬한 삶의 충동, 그 적극적인 힘이다. 이 동력을 받은 망치는 무엇인가. ‘윤회의 쇠사슬에서 첫 원인인 무명을 끊어내라! 윤회의 쇠사슬이 줄줄이 끊어진다!’, 바로 이것이다. 십이연기설이 직관의 세계에서 하나의 역설(逆說)로서 설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골 빠개지는 충격에서 비로서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는 붓다의 말에 귀를 열 수 있으리라.
 
그럼 더 이상 물어선 안된다. 누구에게도 ‘어떻게 무명을 끊어내냐?’고 물어선 안된다. 이 물음은 정말 무명한 질문이며 스스로 구제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는 최악의 고백이다. 십이연기설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뻘 되는 논리의 세계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해도 그 논리의 세계는 자기 것이 아니며 자기 밖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강렬한 삶의 충동, 그 적극적인 힘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그것은 결코 자기의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 배 고프냐? 그럼 밥 먹어라! 이렇듯이 십이연기설을 굴리다가 그것에서 진실로 취할 게 있다면 다음과 같은,  단 한 마디 뿐이다.
 
‘무명을 끊어!’
(어이, 거기 박씨! 착각하지 마, ‘구호’가 아니라 벼리가 벼리에게 쏘는 ‘독화살’이니까.)
 
  • ‘남’이란
  • 잘 늙는다는 것
  • 의회독재를 경계한다
  • 플라톤 왈, ‘나보다 못하는 거시기들’
  • 성남의 한계를 씹는다
  • 여기가 섬이다. 자, 뛰어보라!
  • 진정성이 있냐고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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