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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성남

[벼리의 돋보기] 고향이 어디십니까?

벼리 | 기사입력 2005/02/04 [03:58]

내 고향, 성남

[벼리의 돋보기] 고향이 어디십니까?

벼리 | 입력 : 2005/02/04 [03:58]
회상
 
대여섯 살 때의 일인데 그 일을 생각하니 지금 입 안에선 침이 고인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  여주 산중에서 머물러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갔었다. 산 아래 마을에 머슴 비슷하게 부리던 아저씨가 오솔길 옆에서 빨갛게 익은 열매들이 다닥다닥 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주었는데 그 맛이란! 뒷날 그 나무가 산보리수나무였음을 알았다.
 
구종점에서 지금의 산성동인 옛 창곡동을 오르는 길은 지금도 아주 가파르다. 그 길을 걸어 올라오신 선생님은 10평 남짓 브로끄로 지어진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께 넙죽 절부터 했다. 가정방문으로 오신 선생님은 어머니와 뭔 마음이 통하셨는지 대소주병에 담근 진달래술을 볼과 코 끝이 빨개지도록 드셨다. 그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시는 선생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는데 그 때 배수지 인근 숲에서 흘러나온 뻐꾸기 울음을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봄의 일이었다.
 
아들 둘이 이따금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 물론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있다. 컴퓨터 게임을 주로 하지만 큰애의 경우 드물게 친구들과 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다. 큰애는 친구들과 학교운동장이나 남한산 골짜기로 놀러 가거나 인터넷방을 가기도 한다. 그 바람에 막내도 형들 속에 섞인다. 이 때 에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머니를 털어주거나 먹을 것을 차려주며 “재미있게 놀아라!”하고 한 마디 건네주는 일이다.
 
동심 속에서
 
설이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고향을 찾을 것이다. 유독 팔도 사람들이 모여든 이곳 성남을 두고 말하면 아직은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훨씬 많지만 주변에선 도시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도 적잖이 늘어난다. 집안 어른이나 연고자의 애경사 때 고향 찾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주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고향을 찾는다. 이 바람에 성남은 명절 때 거리가 한산해진다.
 
언론 탓 좀 해야겠다. 언론이 명절 때 고향 찾는 풍경을 늘 앞장서서 망치기 때문이다. 언론은 명절 때면 엄청난 귀성객수와 꽉 막힌 고속도로 사정을 반복하며 여기에다 그렇고 그런 고향 이미지를 양념으로 친다. 상투성의 늪에 빠져버린 언론에선 이미 고향이 희화화되었다. 그래서 마음만 잔뜩 불편하게 하는 그런 언론에 눈과 귀를 뗀 지 오래다. 냉철하게 보자면 언론이 고향을 죽인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우리에게 고향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언론은 왜 그렇고 그런 귀향의 풍경으로 고향을 담아내는 것일까? 사회경제적인 변동의 차원에서 보면 급속한 근대화가 ‘탈고향의 사회’를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한국사회는 고향을 지키고 가꾸는 일보다는 대처에서 먹고 살게끔 아주 ‘천박한’ 근대화를 거쳤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도 고향하면 도리 없이 시골을 연상하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 시골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시골과 도시의 연대를 고려하지 않는 몰상식한 위정자들의 탓이다. 그러니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 놀아난 언론이 귀향을 속물스럽게 그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향은 ‘떠나온 곳’ 이상이다. 특히 실존적인 개인의 차원에서 고향은 켜켜이 쌓힌 ‘시간의 때’로 다가오는데 그 시간은 그냥 시간이 아니라 ‘순수의 시간’이다. 그것은 기억의 그늘 속에 끼인 푸릇푸릇한 이끼와 같다. 그렇게 다가오는 고향은 그냥 그리움, 향수라고 말하기엔 앞으로 남은 삶의 날들에 빛을 흩뿌리는 에너지 같은 것이 섞여서 흐른다. 고향에 대해서 쓰리고 아픈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고향은 그렇게 새겨진다.
 
고향이 개인에게 이렇게 강렬한 회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삶의 체험에서 가장 완고하게 새겨지는 ‘친숙함’ 때문이다. “친숙한 것을 담보해주는 것이 고향의 본질”이라고 하이데거가 말했던가. 게다가 친숙함에는 긍정의 마음이 배이지 않을 수 없다. 부정하는 마음은 결코 친숙함을 느끼지 못한다. 개인의 삶에서 고향에서 접촉한 모든 것들은 다 친숙한 것이며 긍정적인 것이며 가장 완고하게 새겨지는 것이다.
 
회상해보자. 고향 사람들, 그들의 살가운 표정들과 살며시 엿보게 된 아픔들, 마을 앞에 전설처럼 선 늙은 느티나무, 길섶의 좀씀바귀꽃, 팔랑거리는 작은 나비들, 맑은 개울의 물고기떼, 마을에 내려오는 신화와 역사……. 고향은 아련하고 가슴 저리고 감회에 겨운 그런 곳으로 다가온다. 시골이 아닌 도시가 고향인 사람에게는 흑백의 사진처럼 어머니를 따라나선 재래시장의 추억이 떠오르거나 특히 마냥 쏘다니던 골목길이 문득 그러나 아득하게 떠오르리라. 누군가 골목길은 ‘거리의 시’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숙하게 와 닿는 긍정 속에서 고향과 함께 하는 마음은 동심의 세계에 있다. 때 묻지 않은 마음이라는 점에서, 동심은 사람의 첫 마음이다. 동심은 대립하고 갈등하는 부정의 마음을 키움에 따라 지워지기도 하지만 적어도 고향을 회상하는 한 누구에게나 강하게 남아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 동심에서만 고향은 고향으로 다가온다. 고향을 회상할 때 우리는 어린이가 된다. 동심에 빠져 있는 고향은 더 이상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다.
 
성남, 내 고향에서
 
그러므로 동심으로 보는 고향은, 고향의 사람들과 고향의 모든 것들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크게 내딛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지금 여기에서 동심으로 보는 모든 것들, 그리하여 친숙하게 와 닿는 모든 것들이 다 고향이 된다는 것을! 발 딛고 선 지금 여기에서 친숙하게 만나는 사람들, 친숙하게 와 닿는 사물들이 다 고향이, 긍정하고 긍정할 수 있는 고향이 된다는 것을! 고향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결코 ‘고향 만들기’를 섣부르게 외치는 구호의 세계에 있지 않다.
 
▲ 성남은 우리의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아이들의 지속가능한 그것이어야 한다.     © 2005 벼리
 
고향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에 이른다. 고향은 여기와 다른 곳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 이른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친숙하고 긍정으로 와 닿는 한 고향은 더 이상 어제 그 곳에 박제화되지 않는다. 만약 고향이 어제 그곳에서의 고향으로만 남는다면, 그 고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일 뿐이다.
 
아주 어려서 여주 산골에서의 짧은 체험은 내게 고향으로 자리잡았다. 국민학교 시절 서울 청구동에서 친구들, 강아지와 함께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던 일과 약수시장에서 수제비와 순대를 사먹던 추억 역시 강렬하게 남아 있다. 철거민과는 달리 살림살이의 몰락으로 들어온 성남에서, 특히 옛 창곡동에서 겪고 가슴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들은 개발 초기 성남의 역사와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하여 성남사람으로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먼 곳을 나갔다 와도 저만치서 모란민속장의 사람냄새, 장냄새가 풍겨오거나 아늑하게 펼쳐진 남한산 자락에 올망졸망 모인 집들이 한 눈에 들어오면 그래 이제 집에 다 왔다고 마음이 놓인다. 성남사람에게 성남은 결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과거, 떠나고 싶은 그곳이 아니라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많이 잘못되었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여기인 것이다. 자신을 성남사람으로 느끼는 한, 성남은 고향이다. 성남은 내 고향이다. 내 아들들 역시 성남이 고향이다. 성남이 고향인 성남사람의 소망은 다음과 같으리라.
 
성남은 나와 내 아들들의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특히 내 아들들의 지속가능한 그것이어야 한다. 시장 아니라 시장 할아버지뻘 되더라도 더 이상 단발적이고 투기적인 섣부른 개발로 이 삶터에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 성남을 다시 살리는 재개발프로젝트 역시 우리와 특히 미래세대인 우리의 아이들이, 그들이 살아온 성남을 보다 아름답고 보다 추억어린 고향으로 회상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어른으로 살아가는 성남사람 모두가 지금 여기에서 부여 받은 우리 시대의 사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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