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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더듬고 미끄러지고

[벼리의 돋보기] 심심해서

벼리 | 기사입력 2005/02/24 [02:23]

가볍게 더듬고 미끄러지고

[벼리의 돋보기] 심심해서

벼리 | 입력 : 2005/02/24 [02:23]

나이를 먹는 탓인지, 봄이 가까이 오는 탓인지 졸음 오는 때가 부쩍 많아졌다. 예전 같으면 웬만하면 의지를 발휘하고 이유를 달아 참았을 텐데 이즘은 그냥 자버린다. 잠에서 깨어 좌정하고 찻물이라도 끓이면 어느 새 화병에 한 가지 꺾어둔 산수유가 노랗게 웃는다.
 
차를 마시는 일도 심심하고 글을 보는 일도 심심하고 그렇다고 마땅히 할 것도 없어 그저 심심할 뿐이다. 창문에선 그리 밝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두운 느낌이란 전혀 없는 빛이 빛 아닌 듯 눈 앞에 펼쳐진 상에 그득하다. 마치 존재자에 대한 느낌과도 같아, 그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어떠함이며 실체 또한 그러하다.
 
▲ 조그만 나무 판데기에 써 놓은 유치한 글귀, ‘지속’     ©2005 벼리

한 학인(學人)이 조주(趙州)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조주가 “없다”고 답하자 다시 그 학인이 “위로는 모든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왜 개에게는 없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뭐라 답했던가. “그에게는 ‘분별의 버릇(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지금 경계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듯해서 뭐라 이름 붙이기도 귀찮고 그저 심심함이나 느끼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힘들었던 시절도 없지 않았으나 막상 이르고 보니 이른 것도 아님이 또렷해서 그저 슬며시 미소지을 뿐이다. 그러자 문득 얼마 전 조그만 나무 판데기에 써 놓은 ‘지속’이란 글귀가 벽에 기대어 춤을 추는 듯하다.
 
돌이켜 보면 또 다른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이에 조주가 “집집마다 문 앞은 장안(서울)으로 통한다”고 답했을 때, 조주의 답이 그 물음이나 그 물음을 던진 학인을 단박에 판정한 일임은 일찍이 알았다.
 
이 문답을 통해 그 학인의 막힌 곳 곧 경계가 누구나 ‘지금-여기에서-자기’를 알게 하는 불성이 있음을, 이른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涅槃經)’의 확인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 앎으로 삶을 깨닫고 자기를 찾는 공부의 출발로 삼아 지금은 오롯이 발 밑을 살필 뿐, 뒤도 앞도 돌아보지 않는 맛을 안다.
 
아직도 삶은 빗자루로 똥을 쓰는 일과 같고 예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심정에서 글로 세상을 대하는 일은 섬세함을 더하려 하지만 종종 시비를 가리는 일이기도 해서 돌이켜 보면 정말 빗자루로 똥을 쓰는 일이다. 어찌 괴롭지 아니하랴. 이 때문에 글이 아니라 ‘글 밖’을 개입시키려는 수고를 늘 염두에 둔다. 그나마 말은 자제하는 편이어서 그 때마다 안심(安心)을 누린다.
 
아직도 갈 길은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무게’나 ‘깊이’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소통의 도구로서 글 심지어는 말조차 늘 한계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 세상살이의 운명인지라 그저 ‘눈’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새털처럼 가볍게 더듬어보고 다시 미끄러지는 일을 온전히 보존할 뿐이다. 그런 나를 세상이 어찌할 수 있겠는가. 또 어찌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래선가, 심심하다. 심심하니 눈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모든 것이 저마다 다 아름답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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