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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가어른들은 어떻게 생겨났나?

[벼리의 돋보기] 교육과 학문

벼리 | 기사입력 2005/03/08 [01:25]

짜가어른들은 어떻게 생겨났나?

[벼리의 돋보기] 교육과 학문

벼리 | 입력 : 2005/03/08 [01:25]
가르치고 길러내는 일을 교육이라 하고 배우고 묻는 일을 ‘학문(學問)’이라 한다. 교육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이다. 반면 학문은 배우고 묻는 자의 자발성, 감수와 창조의 능력을 강조하며 반드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 이 경우 학문의 뜻은 경험의 체계화라는 교과서적인 정태적 의미를 벗어나 있다. 학문의 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데 있다.
 
개인적인 소신을 하나 덧붙이자면 학문은 상식과는 달리 학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학문을 할 수 있다. 그 학문이 전문적이냐 아니냐는 아주 사소한 문제이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진지하냐, 진실하냐에 달려 있다. 인간의 삶은 불완전함의 연속이다. 이 때문에 죽을 때까지 배우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삶은 불가피하게 학문의 길이며 누구도 예외는 없다. 다만 이런 길에 몸이 어느 만큼 실려 있느냐의 차이만 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위기의 만연’ 상태에 빠져 있다고 느낀다. 위기가 지속되고 위기를 위기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무감각 나아가 무기력에 빠져 있다는 의미에서다. 그 다양한 증세들은 더 이상 재론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입시제도, 교육과정, 공교육과 사교육의 관계, 대학교육, 대안교육, 평생교육 등 각종 교육시스템을 둘러싼 논란은 많으나 그것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논란이 거의 알려지지 않는 것도 지극히 의심스럽다. 요즘 한창 보도되고 있는 각종 교육비리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교육에서 위기의 만연은 ‘교육의 실패’로서 귀결된다. 그 실패는 ‘성숙이 결핍된 어른들의 탄생과 활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교육과정에 있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을 그 시기에 맞는 학문의 주인으로 서게 하지 않아, 그 결과 성숙의 과정을 체험하지 못한 어른들을 양산해온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어른 아닌 어른들 곧 도구적 이성으로 세뇌된 어른들은 세상을 활보하면서 다시 가르치는 자로서 세상을, 교육을 망치고 있다. 요즘 세상을 꿰뚫어보는 하나의 비결이리라.
 
체험컨대 적지 않게 가르치는 자들이 돼먹지 않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에게서 가르침과 배움은 상호적이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동시에 배우지 않을 수 없다. 마틴 하이데거는 “교사가 제자보다 더 나은 점은 그들보다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사실, 즉 배우도록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 단 하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려고만 들었지 가르치기 위한 배움은 없었다. 가르침과 배움의 단절은 가르치는 자가 더 이상 성숙의 도상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배우는 자들도 성숙할 수 없게 한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신물 나게 겪었다. 가르치는 과목의 내용을 머리 속에 입력해두고 그것을 앵무새인양 되풀이할 뿐인 교사나 교수, 박사 학위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 자격증을 받고 더 이상 배움의 열정을 발휘하지 않는 학자나 전문가, 나아가 비교육적 매커니즘에 얽혀 가르치는 자로서의 기초양심마저 스스로 포기한 이들. 적지 않게 가르치는 자들이 단지 사회적으로 쓸모를 따지는 지식의 전수자들에 멈춰 있다.
 
중학교 때 겪은 일이다. 사회과목을 가르치던 한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법대 출신으로 거듭된 고등고시 낙방으로 교사직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과서의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머리 속에 입력해서 수업 때 교과서를 보지 않고서도 가르칠 내용을 그대로 판서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억력이 유달리 좋은 그 교사에게 확인한 것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이른바 ‘깔때기 수업’이었던 탓이다.
 
더구나 나는 스스로 교과서와 참고서를 배합해 과목의 내용을 상당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수업시간이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학기 초가 지나자 아예 그 교사의 강의를 듣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이런 싫증나는 지식 전수에 멈춘 교육현장의 체험이 쌓이자 나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비관적 결론에 빠져버렸다. 그 땐 정말 심각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제도교육의 포기였다.
 
중3 때 한번 어머니의 반대로 실패를 겪고 고2 초에 마침내 학교를 때려치우고 검정고시로 고교졸업장을 따버렸다. 그리고 세상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이 때부터 나름대로 학문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겨 대학진학 때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제도교육에서 좋은 스승이 드물었다는 안타까움이 남아 있다. 내가 겪은 제도교육의 현장은, 대학교육을 포함해서 온전한 삶이 아니라 도구적 이성을 교육적 이념으로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지식을 위주로 가르쳤다는 점에서 좋은 스승이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제도교육을 통한 배움보다 스스로 다양한 삶의 체험을 통해 배우고 묻는 학문으로 크게 배운 쪽이다. 또 사회생활을 통해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지식들이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절실히 느낀 터라 지식의 소유나 향유보다는 이치를 깨닫는 쪽에 학문의 관심을 기울이는 쪽이다. 어린 자식들에게도 이따금 스스로 배우고 묻는 길을 강조할 뿐 저희들 하고 싶은 대로 방임하는 쪽이다. 온갖 컴퓨터 게임과 캐릭터 만들기를 즐기고 몰입하기도 하는 아들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허락받을 때는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간의 교육이 사회제도에 충실한 도구적 인간을 길러내는데 초점을 맞춰 왔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앞으로 개인이 체험으로 겪는 공동체들 속에서 개인의 지상권(至上權)을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을 새로운 교육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제도교육에서 불가능하다면 날마다 겪는 삶의 현장에서, 바로 학문하는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저마다 스스로 배워가야 한다고 믿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른답지 못한 어른으로 세상은 이미 크게 어지럽고, 사람들은 이미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유명인사나 지도층인사와 같은 오피니언 리더로 갈수록, 또 정치지향적인 인간으로 갈수록 성숙하지 못한 어른의 문제는 심각하다. 도덕주의와 명분주의에 정면 대응하지 못하는 그들의 위선과 허약한 체질은 정말 꼴불견이다. 게다가 그들은 충분히 익는 과정을 체험하지 못했으면서 “익은 벼가 고개 숙인다”고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거린다.
 
그러나 그 만큼의 성숙이란 실은 신에 가까운 경지에 속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자의적으로 선택한 말의 비유가 아니라, 인간 삶이 지향하는 기치론적 이치라는 점에서 앙리 베르그손이 강조했듯이 인류애적인 신념과 열정으로 또 그런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는 경계에 있다. 말 밖의 진실함이 문제인 것을 의식조차 못하면서 어른 행세를 하는 짜가어른들, 진실로 성숙이 결핍된 그들은 입으로만 나불거리면서 세상을 기만하고 농락한다. 여기엔 이를 확산하는 나팔수, 언론이 앞잡이로 가세한다. 이것이 문제다.
 
교육의 최종목표 역시 성숙한 어른을 사회에 배출하는데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최종목표가 익었으면서도 고개 숙이는 어른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익는 과정에서 사람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스펙트럼이든 완전하거나 끝이 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한 그 불씨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제 나름의 독특한 성숙의 이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 점에서 나는 위선의 행동에 마주칠 때 위악의 침을 뱉는 것을 성숙의 징표로 삼는다.
 
가령 “익은 벼가 고개 숙인다”고 범인인 나로선 감히 써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성숙의 징표를 입으로만 자의적으로 나불거리는 자에게 ‘니 에미 XX’이란 충언으로 찌르고 싶어진다. 그것을 견디지 못할 때, 집착심을 드러낼 때, 그는 스스로 위선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때 내 성숙의 징표는 위악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학문의 길에서 몸으로 익힌 것이며 자주 세상과 사람들의 위선과 불화(不和)하고 또 이를 마다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말이나 글은 사람의 삶이 하늘과 땅의 질서,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날수록 겉돈다. 사람의 삶 그리고 그 표현인 말이나 글과 자연의 질서 사이가 성글어지는 것이다. 내가 자주 말이나 글의 속내를 보려 하고 말이나 글보다 그 사람의 표정과 눈빛, 몸짓을 상상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성숙이 결핍된 어른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교육과 학문을 생각하고, 꼴리는 대로 학문하는 자로서 여기서 쏟아내는 말은 결코 말에 있지 않으리라. 한 마디 덧붙이자.
 
‘뜻은 말 밖에 있다(意居言外)’
 
  • ‘남’이란
  • 잘 늙는다는 것
  • 의회독재를 경계한다
  • 플라톤 왈, ‘나보다 못하는 거시기들’
  • 성남의 한계를 씹는다
  • 여기가 섬이다. 자, 뛰어보라!
  • 진정성이 있냐고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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