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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벼리의 돋보기] 미래는 없다

벼리 | 기사입력 2005/04/07 [06:40]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벼리의 돋보기] 미래는 없다

벼리 | 입력 : 2005/04/07 [06:40]

궁극의 참은 시간 속에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宗非促延)
한 생각의 순간이 만년이요(一念萬年)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가 없어(無在不在)
어느 곳에서나 바로 눈 앞에 있네(十方目前).
---승찬(僧瓚), 신심명(信心銘) 일부


희망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글로, 말로, 노래로, 독백으로, 또 어떤 실천으로. 뒤집어보면 그만큼 희망적이지 않은 과거나 현재의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보면(이런 눈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 현실감에서 벗어나려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동인임을 알겠다. 자연스러운 한에서, 이런 한에서 모든 희망은 맑게 비치곤 한다.
 
그러나 희망이 자랄수록 희망의 심리에 편승하는 일도 자란다. 엄하게 가려볼 일이다. 가짜란 늘 진짜 같고 종종 진짜보다 더한 진짜로 착각을 불러들이는 탓이다. 이 가짜희망의 극단적인 형태는 밀란 쿤데라의 독특한 용어를 빌려쓰면 이른바 이마골로지(Imagology)의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늘 미래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는 최악의 상태다. 단지 몇몇 선동적인 구호와 코드화된 빤한 이미지로 희망인양 위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살이다. 뼈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반응하다가도 금새 무덤덤해진다. '개혁', '열린', '진보'와 같은 구호들, 이에 짝을 이룬 그럴듯한 이미지들은 삶의 실질과 어긋나는 딱딱함을 이내 폭로하고 만다. 이념과 거대담론의 시대가 지난 뒤 사람들의 탈정치적 성향은 그 뚜렷한 징표이리라. 다음 차례는? 자본주의 상품체제가 되지 않을까.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만 후자 역시 늘 미래로서만 제시된다는, 따라서 미래를 미래로서만 유예시킨다는 맹점을 드러낸다. 그들의 구호와 이미지는 늘 '이제 다시', '새로운'. '희망'과 같은 시간의 유예를 드러낸다. 말랑말랑하지만 그들은 늘 미래에 있다. 오는 미래가 아니라 결코 오지 않는 미래라는 의미에서다. 그만큼 그들은 삶의 실질에는 전혀 개입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습관적 반복을 되풀이한다. 그들의 지독히 상투적인 헛짓, 가히 구토가 날 지경이다.
 
딱딱하든 말랑말랑하든 아무튼 희망에 편승하는 가짜희망에 ‘Fuck you!’를 외치는 일은 필요하다. 말로만? 아니다. 제 삶으로 비판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비판과 거부에는 척도가, 그것도 자기척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 척도는 세상이 징그러운 만큼 지독해야 한다. 그것은 지독한 사랑의 체험 없이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겠다.
 
삶에서 가장 현실감 있는 것은 순간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순간이다. 삶의 지속이란 통찰하면 다만 매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여기서 유력한 논거를 그 어떤 그럴듯한 이론으로 제시할 필요는 없다. 전혀 형이상학적 논거를 끌어댈 수 없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 몸이면 족하다고 믿는다. 순간마다 몸의 느낌, 본성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포착하면, 몸을 비껴가는 모든 희망은 모두 가짜임을 또렷이 알 수 있다.
 
배고픈 거지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장 밥 한술 내준다. 그것이 최상의 정책이며 최상의 실천이다. 이야말로 최상의 희망이다. 정책과 실천을 다루는 자들이 거의 대부분 놓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삶은 체험으로 알고, 체험으로 드러내며, 체험으로 공유한다. 삶이야말로 철저히 실존에 속하기 때문이다. 체험의 경지에선 순간에 최선을 다한 행위가 영원의 행동이다. 그 때, 나와 남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비로서 나 밖의 세상이란 의미도 사무치게 다가온다.
 
배고픈 거지에게 당장 밥 한술 내주지 않으면서, 당장 밥 한술 내주지 못하면서 누가 희망을 노래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극단적인 이마골로지와 미래를 유예시키는 자들은 삶에 계속 헛짓을 연출한다. 몸은 전신이 눈인데도 말이다. 겉도는 그들로부더 무슨 기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매 순간의 실천 여부로 희망의 진위는 가려진다.
 
게다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모든 것을 향해 자유롭고 싶다면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느낌과 생각, 몸짓으로 몸부림치는 수밖에 없다. 도대체 저 세상의 온갖 일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몸부림치며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은근히 미소짓는 일이 어찌 없으랴.
 
이것이 바로 희망의 진위를 가리는 내 척도다. 그럼 너는 어떠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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