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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둥이를 조심하자

[벼리의 돋보기] 눈과 귀를 소중히 여길 뿐

벼리 | 기사입력 2005/05/06 [01:29]

주둥이를 조심하자

[벼리의 돋보기] 눈과 귀를 소중히 여길 뿐

벼리 | 입력 : 2005/05/06 [01:29]

무제가 말했다. “나와 마주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무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마는 결국 강을 건너 위나라로 가버렸다.(벽암록 제1칙 두 번째 문답)


신문을 보지 않는다. 돈을 아껴야 하는 이유도 있고 보기 싫은 이유도 있다.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신문조차 보지 않는다. 보기 싫어서다. 신문을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보기 싫어서인 셈이다. 돌이켜 생각해본다. 사춘기 시절 떠돌아다니면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사당을 지키던 한 후손을 만난 적이 있었는 데, 그 분 말씀 가운데 “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대목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가 그렇게 될 줄이야!
 
혹여 누군가 보기 싫은 근거들을 대라면 그것은 내 입장에서 한참 어긋난 질문이다. 물론 나는 얼마든지 그럴듯한 근거들을 댈 수 있고 거기에 폼 잡는 해석도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변명조차 내겐 부차적이다! 의식이란 이름의 자아보다 몸이 가리키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삶을 통해, 삶이라는 공부를 통해 터득했다면 터득한 것이다. 그래 혹여 누군가 내게 이성의 가치를 무시한다거나 아예 이성이 없다고 깎아내릴 지 모르겠다. 그런 타박이라면 얼마든지 달게 받을 수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지적이기에.
 
이렇게 저렇게 인연 되어 읽게 된 글들, 대면하는 사람들의 말들 가운데서 적지 않은 글들, 말들에서 어떤 경향을 느낀다. 그것은 특히 사회적 차원의 담론에서 유별난 경향이다. 그 경향이란 앎과 그것을 바탕으로 개념과 논리의 얼개를 통해 추론하는 이성이 굉장한 득세를 부린다는 것이다. 이 득세는 양적인 측면을 넘어 질적인 측면에까지 걸쳐 있다. 앎이 요즘은 정보라는 말로 대체되곤 해서 앎이 별로 없다거나 하다못해 정보라도 별로 없는 무지렁이는 앎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좍 깔면서 웅변하는 이성이 득세하는 자리에는 끼기 어렵게 되었다(나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으로부터 무서운 호랑이를 떠올리곤 한다).
 
겸손한 태도를 잠시 버리고 내게 있는 앎을 따져보면 나는 웬만한 사람의 수준은 넘는 편이다. 그 앎은 경험에서 나온 것, 호기심이 강한 편이라 관련 글을 찾아서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나 알게 된 곧 자발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내게 있는 앎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유용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회적 차원의 담론과는 거의 무관한, 쓸모없는 게 주류를 이룬다는 데 있다. 물론 앎의 유용성이란 상대적이다. 내게 있는 앎이란 주로 나 혼자 잘 살고 나 혼자 신바람나게 즐기는 데에는 아주 쓸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이란 시간의 힘을 견디지 못한다. 특히 몸으로 알게 된 앎이 아닐 경우 더욱 빠르게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소멸한다. 내 경우 역시 많은 앎이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단순히 기억력 감퇴현상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이런 현상이 절감되고 그 부질없음에 깜짝 놀라게 되자, 그 순간부터 앎으로부터 일탈을 각오했고, 알고 모르고에 개의치 않는 태도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머리가 그 전보다 상당히 맑아졌다. 그 결과는? 몸이 그 전보다 상당히 가벼워졌다.
 
이 같은 태도에서 사회적 차원의 담론에 동원되는 앎을 직시하면 과연 그것이 진짜 앎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과연 당사자가 늘어놓는 앎이란 것이 그 앎을 받아들이는 능력인 감성이나 판단하는 능력인 오성에 기초한 것인지 또 오성이 만든 것을 앎으로서 타당하게 자리매김하는 능력인 이성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이성이 감성이나 오성을 거치지 않고 오만하게도 제멋대로 만들어낸 앎인지, 하는 것이다.
 
칸트는 후자 곧 이성이 오성이 만든 것을 앎으로 키워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월권을 해 제멋대로 만든 앎을 '사생아'라고 불렀다. 족보도 권리도 없으니, 진짜 앎이 아닌 가짜, 사이비 앎이라는 뜻에서다. 사회적 차원의 담론에 나로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왠 별난 개념들, 논리들이 구사되고 있는지! 뭐 그리 아는 것들을 많이 늘어놓는지! 그것을 대면하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갈 뿐이다.
 
(고백하면 언론에서 ‘올인’이라는 말을 쓸 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엊그제도 누구와 대화를 하는데, ‘유비쿼터스’라는 말을 써서 무슨 말인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쓰는지부터 묻고, 듣고, 그런 다음에 상대의 얘기를 경청했다. 특히 신문을 보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개인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이나 어쩌다 우연히 보고, 인터넷도 별로 이용하지 않는 편이라, 얼마 전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DJ의 숨겨놓은 딸이 화제에 올랐을 때 처음에는 진짜 무지렁이 취급을 받았다.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된 유머러스하거나 시니컬한 유행어를 일상생활에 차용해 쓸 때는 나는 정말 어떤 반응도 못하는 원시인이 되기 일쑤다.)
 
이런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그들이 거의 대부분 자신 있게 말하는 앎이란 것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그것이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느끼고 사고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거나 또는 아주 전문가주의적 냄새가 짙거나, 아니면 대중매체나 인터넷으로부터 온 것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특히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으로부터 전해진 앎은 부박하게 다가오거나 특히 그것을 문제로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리감을 주는 것 같다.
 
앎이 제 삶에 진정으로 쓸모가 있냐 없냐로 따져볼 수 있듯이, 다시 앎은 일차적인 앎과 이차적인 앎으로 따져볼 수 있다. 자기의 감성과 오성을 거쳐 오성과 이성의 조화로운 역할 배합에 따른 앎이 일차적인 앎이라면 이차적인 앎은 교과서, 대중영합적인(대중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에 대해 아는 척하면서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고,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책들, 텔레비전, 인터넷에 의해 유포되는 앎이다.
 
일차적 앎이 구체적인 체험과 체험하는 장소에 기반해 몸에 각인되는 앎이라면, 이차적인 앎은 탈체험적이고 탈장소적이다. 이차적인 앎이 항상 조작 위험에 노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사이비 앎일 가능성이 높다. 일차적인 앎이 제 삶과 제 삶의 몸짓에 기반한 것이라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것은 항상 이차적인 앎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려보고 자기의 앎이 사이비로 전락되지 않도록 경계의 눈초리를 잃지 않는 앎이다. 일차적인 앎은 자기의 앎에서 가장 확실하다. 자기 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차적인 앎은 일차적인 앎을 풍부하게 하는 보조물일 뿐이다. 그것도 다만 유용성의 세계에서만이다.
 
제 삶과 제 삶의 몸짓에서 나오지 않은 이차적인 앎을 잔뜩 머리 속에 쑤셔놓고서 그것을 무기삼아 이성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 생각하고 그 형식과 매개로서 글이든 말이든 드러낸다? 나로서는 글을 통해서든 말을 통해서든 그런 앎을 대면할 때마다 우선 거리감이 크고 또 얼마나 약발이 있을지,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빈번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대개는 공허함 그 자체다. 남의 글, 남의 말을 대할 때 늘 체질하듯 걸러 대하는 경계심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나는 무지한 자”라고 고백한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모든 앎의 탐구와 점검에서 잣대로서 작용될 수 있으리라. 사회적인 차원의 담론에서 많이 안다고 깝죽거린다거나 내가 보기에, 내가 듣기에, 사이비 지식에 불과한 앎을 유포하는 행위를 체크하면서 자신에게도 이 소크라테스의 무지를 칼날로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앎에서 이차적인 앎을 가려내고 이차적인 앎이 일차적인 앎에 득세하지 못하게 끌어내리고, 더구나 유용성이 요구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차적인 앎에 그쳐 이차적인 앎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 내가 종종 도달하게 되는 자리가 있다. 그것은 뭐라고 할까, 아주 담담한 자리다. 그 때 이는 느낌과 생각, 그리하여 들려오는 말들,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그 무엇도 전혀 거리감이 없는 충만한 어떤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는 것도 있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다만 눈과 귀를 소중히 여길 뿐이다. 눈을 뜰 때나 감을 때나, 귀를 열 때나 닫을 때나. 왜, 너무 끓이면 맛이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주둥이를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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