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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을 주목하자

[벼리의 돋보기] 삶의 정치를 향하여

벼리 | 기사입력 2005/05/19 [00:35]

일상생활을 주목하자

[벼리의 돋보기] 삶의 정치를 향하여

벼리 | 입력 : 2005/05/19 [00:35]
'삶'은 정의될 수 있는가? 삶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되는 ‘삶의 정치’는 정의될 수 있는가?(이 두 개의 질문에서 눈치빠른 이는 삶으로부터 괴리되지 않는 정치가 고려되고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아마 정의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마음의 습속이 있고 그에 따른 추세가 없지 않아, 지배적인 어떤 관점에 따라서는 삶과 삶의 정치가 정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정의는 삶과 삶의 정치를 추구하는 누군가에게 개념적인 의미보다 매우 급박한 실천적인 의미의 차원을 확보할 것이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외견상으로 삶은 생로병사의 자연적 필연성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외견에 주목하는 한, 삶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대로 늘 ‘고통’으로 와 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외가 없진 않지만,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산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이 아닌가. 이 자체가 말해주는 것은, 삶은 그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삶에 대한 성찰적인 고찰은 삶이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것을 삶에의 의지라 부르든 내적인 충동이라 부르든, 그것은 삶을 지속시키는 거의 유일한 수레바퀴임에 틀림없다.
 
삶은 무엇을 원하는가? 건강과 생기, 행복을 원한다. 때때로 어떠한 이유에서든 좌절과 불행, 그리고 내적인 비애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 해도 그렇다. 그것들을 감당해내는 내적인 힘을 갖고 있거나 나아가 그것들을 극복해가는 삶이라면 그 삶은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삶, 행복한 삶이다. 그런 삶을 나는 원한다. 너도 원한다. 그것은 ‘온전한 삶’ 바로 그것이다. 이 점에서 삶의 영욕과 외견상의 성패는 삶의 온전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들은  결코 삶의 참모습을 비추지 못한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다!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이 훨씬 많다! 교양있는 사람보다는 무식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나이 먹을수록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든 사람이 훨씬 많다! 게다가 누가 삶의 영욕을 피할 수 있으랴!
 
이런 삶과 괴리되지 않는 정치, 삶을 배반하지 않는 정치, 나아가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는 ‘삶의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정치가 건강과 생기, 행복을 원하는 삶 자체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삶의 정치가 아니다. 떠올려보라. 언론에 떠도는 정치담론과 텔레비전의 정치토크쇼에서 그들의 말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그들의 말은 얼마나 삶과 거리가 먼가! 그것은 헛된 주둥이질, 헛된 제스처로 넘쳐난다. 신문이 보기 싫다! 텔레비전이 보기 싫다! 그것은 다만 삶의 은폐가 아닌가! 도대체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관점에서는 절실히 느낀다, 삶의 정치가 우선 주목할 지점은 삶 자체임을.
 
삶을 은폐하는 정치는 삶의 주인공들이 삶 자체를 말하는 정치, 삶의 영역들을 요모조모 드러내는 정치 그리하여 자신 스스로를 권력의 최종목표로 삼았다가 결국 몸 망침으로 귀결되는 권력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자신들을, 그 삶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정치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정치야말로 그 핵심에서 ‘폭력’인 거짓 정치의 속성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삶에 봉사하는 정치로 대체할 것이다. 그리하여 딴 나라 얘기로만 귀결되었던 정치가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삶, 행복한 삶의 지향에 친근하고 필수적인 그 무엇으로 들어올 것이다.
 
삶의 정치가 삶과 맺는 관계가 자연적이라면 삶의 정치가 출발하고 살펴야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할 터는 어디인가? 바로 일상생활이다. 일상생활이란 “하찮지만 견고한 것, 당연시되면서 모든 생활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의문시하지 않으며 무기한적이고 특별하지 않는 삶”(앙리 르페브르)이다. 이런 생각에서 일차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왜 일상생활이 삶 그 자체인데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매일매일 당연히 겪는 것이니까? 아니면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것이니까? 하찮거나 아니면 딱히 내놓을 만한 것이 없어서? 시시콜콜한 얘깃거리나 매달려서? 사적인 것이 많아서? 아니면 뒤가 구려서? 그런가?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일상생활 속에는 강렬한 삶의 충동과 의지가 숨어 있다. 일상생활을 떠난 삶의 충동,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하고 생기에 찬 삶, 행복한 삶이라는 목표는 그 일상생활에서 간절히 원해지는 것이며 일상생활에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따금 내가 유희하듯 언급하곤 하는, 초월의 그 맹물 맛 같으면서도 유연하고 강건한 세계조차 실은 일하고 밥 먹고 쉬고 즐기는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거꾸로 일상생활은 현실에 굴종하는 삶이 되풀이되는 공간이며, 요즘 시대에 두드러진 특징인 ‘생각하지 않는 삶’을 재생산하는 공간임을 입증한다. 이곳은 각종 편협한 이데올로기 또는 밀란 쿤데라가 말한 이마골로지의 억압이 지배하는 현실의 공간이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또 요즘 시대의 두드러진 사회문화적 상황(가령 대중사회, 소비사회, 문화의 우월성 등)을 염두에 둘 경우, 좋은 세상을 겨냥한 실천에서 일상생활에 대한 주목과 기획은 핵심을 차지한다. 주목하자. 일상생활이란 공간에서는 다양한 삶들이 놓여 있다. 그것은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일상생활이란 공간은 다양한 계급이나 계층이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는 하나의 유력한 근거지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장소적 의미의 도시화된 지역이다. 자본주의화를 도시화로 읽어낼 수 있다면, 이 근거지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기획은 하나의 의미있는 역설을 낳을 수 있다. 역사적인 경험 하나를 사례로 들 경우, 이 일상생활에 대한 주목은 프랑스에서 그 사회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지적해둔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주목한다고 해도 그것을 끄집어 올리는 순간 망막한 바다 앞에 선 아찔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분류기준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분류된 각각의 영역의 광대함 때문이다. 앙리 르페브르의 도식에 따라 간단히 예를 들 경우 직업생활, 신앙생활, 가정생활, 여가생활 각각은 어느 것 하나 녹녹치 않을 만큼 광대하다. 둘째는 일상생활에 대한 사고들이 국내외적으로 아직은 일천하다는 데 있다. 일상생활을 역사상 처음으로 의미있게 접근한 르페브르를 비롯해 그밖에 미셸 드 세르토, 피에르 브르디외 같은 사람들의 시사적인 생각을 점검하고 더러 차용한다고 해도 다일 수 없고 한계도 있어 보인다. 게다가 한국에선 아직은 별다른 생각들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끝으로 일상생활을 억압과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복마전으로 만드는 요즘 시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에도 무기력을 느낄 만큼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들은 거꾸로 무궁한 기획, 무궁한 일거리가 우리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와 힘으로 가능하다는 역설을 발견하게 한다! 일례를 들어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을 학문적으로 풀어온 사회학자 정수복은 생활협동조합운동, 공동육아운동, 정신질환자나 노인의 공동체적 부양, 탈가족주의적 작은 모임, 대안학교운동 등을 사례로 들면서 “이해관계의 연줄망으로 작용하는 한국인의 모임을 공공영역에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미시적 동원맥락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럼 일상생활은 어디에서부터 접근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그것은 당장은 여가생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른 영역들은 현실적으로 접근에 많은 장애들이 있다. 그러나 이 불가피성은 반드시 소극적인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여가생활이야말로 삶의 재충전이 가능한 곳이고 이곳에서의 놀랄 만한 긍정적 체험과 이를 통한 성찰의 시간은 다른 삶의 영역들에도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체 그물을 들어 올리는 벼릿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가생활에 대한 기획은 어떠한 접근방법이든 그 출발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의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현실을 비추는 ‘촛불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 두 개의 커다란 방법적 틀 안에서 다양한 창의적인 구상과 이를 구체화한 기획이 가능하리라. 중요한 것은 어느 방향에서 오는 기획이든 상보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의 기획에서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체험이며 그 체험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삶은 어떠한 이론이나 개념으로도 늘 불충하게 이해될 만큼 실존적이다. 곧 이런 실존을 반영한 삶의 기획이 그 원칙에서 어찌 체험과 그 체험에서 불가피하게 비롯되는 성찰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가 밟아온 천박한 근대화로 인해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사태가 역사적임을, 따라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일상생활이란 공간은 억압의 현실공간이며 생각하지 않는 삶을 유도하는 공간으로 존속한다. 체험과 그 성찰은 개인들에게는 삶 전체, 일상생활 전체에 대한 태도에서 획기적인 각성을 불러일으켜줄 것이다. 비로소 억압과 이데올기적인 편견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신의 내적인 힘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일상생활의 기획을 목표한다면 체험과 성찰에서 거두어 올린 그러한 힘으로 서로 어우러져 자신 밖의 현실문제들을 분석하고 비평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행동의 지침들을 마련하는 시간을 정점에 올려 놓아야 한다. 이러한 정점의 시간을 통해 일상생활의 희생양들은 자신의 문제 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각성된 뚜렷한 존재들로 일어설 것이다. 이들이 바로 삶 자체로서 삶의 정치를 말하고 실천하는 삶의 정치의 주인들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삶을 은폐하고 삶의 정치를 오랫동안 말살시켜온 권력자들과 그 앞잡이들과 기생의 무리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시킬 힘이다.
 
누가 삶 자체를 말할 수 있을까? 누가 삶의 정치를 펼칠 수 있을까? 누가 낡은 정치의 개념과 현실을 들추어내면서 그것을 바꿀 수 있는가? 꿈인가? 허황된가? 그는,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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