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를 놓고 여럿이서 거북이라 우기면 그것이 거북이가 된다던가. 바로 그것이 ‘三人證龜(삼인증구)’다. ‘패거리 짓’을 조심하라는 경구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것은 사실 또는 가치의 위조를 초래하는 까닭이다.
삼인증구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이 있으면 되겠다. 말 그대로 거리를 두고 남과 자기 또는 남의 것과 자기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되겠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남이나 남의 것을 긍정하면 긍정하는 대로 부정하면 부정하는 대로 자기나 자기 것의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거리의 열정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사람의 질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찌 사람의 질이 다른데 사람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자를 고귀한 자인 귀족으로 후자를 비천한 자인 노예로 니체가 구분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의회 본회의장에서 시청이전에 찬성하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지난 1일 해당 상임위에서 그 의사표시의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황당한 일이다. 고작해야 말놀이 수준의 발언만이 있었을 뿐이다. 냉철하게 말하면 ‘오합지졸’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다. 오합지졸의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한다. 오합지졸, 그런 하수들을 믿고 따를 지지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이대엽 시장이 볼 때 의원들의 차이는 커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어쩌면 그 차이는 이미 부정되고 있을지 모른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대엽 시장 앞에서 평등할 것인가? 시청이전문제를 놓고 이대엽 시장 앞에서 평등할 것인가? 그 평등이란 무엇인가? 무슨 근거가 있겠는가? 새겨두시라. 시청이전은 이대엽 시장만 포기하면 100% 포기되는 사안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 핵심을 잊지 않는다면 三人證龜는 면할 수 있으리라. 시의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이순복 의원이 흘린 뜨거운 눈물. 자신을 뽑아준 주민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전언은 좋은 참고가 되리라.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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