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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의 대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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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의 대표가 아니다

〔벼리의 돋보기〕권력을 넘어서

벼리 | 기사입력 2007/07/10 [21:39]

그들은 우리의 대표가 아니다

〔벼리의 돋보기〕권력을 넘어서

벼리 | 입력 : 2007/07/10 [21:39]
“이 시장을 엄벌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대엽 시장의 선고 재판을 다 지켜본 뒤 한 방청객이 말한 것이다. 판결에 이르는 판단 과정을 크게 처음과 나중으로 양분할 수 있다면 처음과 나중이 매우 달랐던 탓이다. 처음에 무게를 둔 처지에선 나중으로 인해 뒤통수 맞는 기분을 맛보았을 터이고 처음에 재판장이 어떻게 판단하든 나중에 무게를 둔 이 시장 쪽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다.

대체 이 일빈일소(一嚬一笑)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두 번 경험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들의 말길을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낭패 보기 쉽다. 말과 처신이 달라 그야말로 팔아먹을 대로 팔아먹은 제 이름값도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직업이 말꾼인지라 그야말로 말장난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시야를 크게 보면 말과 처신이 다르다는 것도 결국 말장난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처신이지 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나라 정치인들 대다수가 내뱉은 말과 처신이 달라 수준 미달, 함량 미달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지적이 아니다. 명분과 체통을 중시하는 우리네 선비적 전통에서도 크게 일탈되어 있어 후안무치한 일들이 심심치 않은 것도 오늘날 정치판의 몰골이다. 게다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등장한 지자체장, 지방의원의 경우 수준 미달, 함량 미달의 정도가 아니다. 경험컨대 저질, 저급의 부류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현실의 반영이다.

더러 정치판에 나가 일하는 후배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스스로 건달이라 부르거나 건달세계 비슷한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창녀와 기생이 같을 수 없듯이 양아치와 건달이 같을 수 없다. 건달은 의리가 있다. 스스로 건달이라 부를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시민에게 ‘호박씨 까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한 셈이다. 누구나 뛰어난 정치인이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양아치는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있어야 그래도 정치할 만하다 하겠다.

그나마 스스로 건달이라 부르는 정치인이 있음을 위안 삼기도 하는 것은 그만큼 정치판에 기본도 안 되는 것들이 난무하는 까닭이다. 특히 지역정치판은 불문가지다. 그들로부터는 저자거리에서 양아치, 똘마니, 밴댕이, 찌질이 등으로 부르는 저질, 저급의 기호가 난무하는 까닭이다. 그 바닥이란 스스로를 건달이라는 부르는 자들의 세계에는 감히 견줄 바가 되지 못한다.

얼마 전 경향신문은 “지방의원 유급제 실시 이후 지방의원들이 ‘의정활동 성적표’는 초라한 반면 ‘잇속 챙기기’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며 기사 제목을 ‘여전하신 지방의원’으로 뽑았다. 기사제목에서 의미심장한 여운이 남았다. 어인 일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방의원 진출을 ‘주인의 개’가 되겠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니 지방의원 진출이 닭벼슬만도 못한 벼슬자리와 이권 챙기기의 수단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이미 손가락질 받고도 있지만) 이런 가련한 인생도 세상엔 있는 법이다. 그러니 정치인들이 시민의 뒤통수를 친다고 해도 더는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개들의 주인으로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권력을 휘두르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권력을 휘두르는 그들이 우리와 다른 부류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거부되어야 하며 거부되기 위해 철저히 감시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순진한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앎)이 힘’이라고 했지만, 냉철한 푸코는 반대로 ‘힘(권력)이 앎’이라고 말한다. 권력이 앎을 만들고 앎 또한 권력을 전제하거나 구성한다는 뜻이다. 베이컨은 앎의 순수함에 빠뜨린다. 앎이 얼마나 권력적인지, 권력지향적인지 따라서 권력이 얼마나 다양한 앎의 형태로 유통되는지, 권력의 포섭 하에 유통되는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 푸코는 반격한다. 권력에 의해 무한히 조작가능한 게 앎이라고.

최근 성남시립병원 설립문제, 청소년육성재단 설립문제를 둘러싼 각종 얘기들 특히 한나라당 시의원들의 발언에 ‘겉과 속이 다르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면 쓰냐’라는 정도의 비판, 앎의 순수함에 빠진 순진한 발언일 뿐이다. 냉철하게 봐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이 다름의 교묘함, 이 교묘함을 구사하는 그들의 권력이다. 그들은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력으로서 한 가지 조작된 앎의 형태인 ‘겉과 속이 다른’ 앎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누가 누구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듯이 어떤 이론도 어떤 사회제도도 ‘누가 누구를 대표할 수 없다’는 우리의 믿음을 꺾을 수 없다. 그들이 우리의 대표가 아닌 것처럼 그들의 앎, 그들의 권력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것은 X도 아니다! 이 때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다. 꺼지지 않는 등불과 같은 것, 삶은 이론과 제도를 뛰어넘는다. 종종 삶을 규제하는 제도로 인해 상처받는 삶이긴 하지만, 삶은 앎과 권력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태양의 빛을 받고 있는 온 누리에 감추어진 것이란 하나도 없다. 눈을 밝히고 보면 그대로 증명될 뿐이다. 눈을 밝혀라(點)! 삶이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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