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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가치있는 활동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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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가치있는 활동은 불가능한가?

〔벼리의 돋보기〕‘학력위조사태’에 대한 두 개의 비판

벼리 | 기사입력 2007/08/19 [23:58]

그 자체로 가치있는 활동은 불가능한가?

〔벼리의 돋보기〕‘학력위조사태’에 대한 두 개의 비판

벼리 | 입력 : 2007/08/19 [23:58]
‘학력위조’ 파문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사태’다. 학력위조 사실이 드러나는 ‘형식’을 보면, 언론이 먼저 찔러서 들통이 나는 경우가 있고, 들통이 날까봐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어찌됐든 전자는 타의에 의해, 후자는 자의에 의해 들통이 난 것이다. 타의에 의해 들통이 나는 경우, ‘유구무언의 자세’가 들통이 난 자의 기본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차한 변명’이 따라붙는다. 그야말로 뻔뻔스럽고 구제불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들통이 날까봐 자의에 의해 고백하는 경우, 남 앞에 나서기 좋아했던 전날의 태도에 비하면 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백하는 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가만 들어보니 결국은 변명하고 비틀고 용서를 호소한다. 학력위조를 수단 삼아 ‘유명세’를 얻고 그로 인해 부와 명예를 얻은 자들이 자의로 학력위조를 고백해 놓고도 변명하고 비틀고 용서를 호소하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 그들의 자의는 말 그대로 자의(恣意)에 불과하다. 그 고백이 결코 자의(自意) 곧 자유의지에서 나온 게 아님이 분명하다.

자의적인 고백들의 경우 한결같이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학력위조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서 대하는 사회 분위기에 얼렁뚱땅 편승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편승은 인간 심리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참회하면 자신의 죄를 잊는 위안을 얻을지 몰라도 타인은 그 죄를 잊지 않는 법. 이런 인간의 심리를 과소하게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전적으로 타인의 몫이며, 그것은 선물에 속한다. 하물며 ‘그 참회가 과연 진실할까?’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바에랴!

어쨌든 학력위조 사태는 사회적 파장만큼이나 ‘엄중한 사회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아무리 지나쳐도 부족하다 할 만큼’ 따지고 물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 ‘엄격한 사회적 책임’이 뒤따라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책임이란 ‘어느 누구의 책임’으로 따지고 물어야 제대로 따지고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사태에 쏟아지는 ‘사회적 공분’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다. 그래야 ‘공정경쟁의 룰 지키기’라는 사회 분위기의 조성, 그리고 이를 통해 침체된 한국사회의 ‘재도약’에도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학력위조 사태의 무대가 ‘문화의 영역’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후기자본주의’는 경제나 정치만의 문제가 아닌 문화의 문제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바로 그 문화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라는 점이다. 문화의 문제는 경제나 정치 영역에서의 모순을 ‘물타기’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자본의 가치법칙이 작동되는 시장’에 깊숙이 포섭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자본주의가 이른바 ‘대중’이 열광하는 대중매체는 물론 예술가들, 대학교수들 심지어 종교인들까지도 동원되는 ‘대중자본주의’의 모습을 띄고 있음을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이런 대중자본주의 아래에서, 따라서 유명세 그 자체가 ‘문화시장’에서 돈이 되는 상황에서, 따라서 (‘학력숭배’라는 한국사회 특유의 우상숭배에 맞물려) 그 유명세에 어울리는 학력이라야 유명세라는 돈을 만드는 ‘노동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학력 딸리는 사람들의 학력위조는 불가피했던 셈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들의 학력위조가 아니다. 그들을 학력위조로 몰고 간 대중자본주의, 가장 첨예한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는 후기자본주의가 문제인 셈이다.

물론 일부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학력위조 사태에 대한 치유책으로 ‘대학의 서열 폐지’, ‘검증시스템 마련’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는 학력숭배사회라는 한국적 특수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대중자본주의라는 ‘진짜 괴물’에는 여전히 눈을 돌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자신의 활동에서 우선적인 가치척도를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자신 그리고 남에게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새로운 가치 창조가 가능하냐 안 하냐’를 삼는 일에 있다.

유명세를 타든 안 타든, 돈이 되든 안 되든 자신의 활동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에 가치 있고 남에게도 가치 있는 활동이 될 수 있는 조건들, 새로운 가치 창조의 활동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을 고민하고 모색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치척도를 기준으로 우선적으로 그 사람의 삶과 활동을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 그러나 이런 고민과 모색 없이 학력숭배사회라는 질병도 완화될 수는 있어도 결코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다음과 같은 말을 진지하게 음미할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고 믿는다.

“진실로 소상인들처럼 소상인들의 돈으로 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값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가치가 적은 것이다.”(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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