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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그런 일을 겪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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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그런 일을 겪었을까?

〔벼리의 돋보기〕한국의 교회·기독교가 그렇다

벼리 | 기사입력 2007/09/01 [04:21]

그들은 왜 그런 일을 겪었을까?

〔벼리의 돋보기〕한국의 교회·기독교가 그렇다

벼리 | 입력 : 2007/09/01 [04:21]
보편성이란 개념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특정집단의 차원에서, 민족이나 국가의 차원에서 아무리 보편성을 주장한다 해도 그것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파정치, 대의정치 곧 재현의 정치라는 정치 현실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빈번하게 우리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한 민족의 선이 다른 민족에게 악이거나 웃음거리인 경우도 빈번하다. 그럼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는 종교나 사상, 사회운동의 경우는 어떨까.

실제 이런 종교나 사상,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정당성은 오직 ‘인류적 차원’에서만이다. 그것도 행위의 수준에서다. ‘민족이나 국가 또는 그 연장의 차원’에서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후자를 내세울 경우 민족이나 국가, 그 연장은 단지 패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흔히 보편성을 내세우는 종교나 사상 뿐 아니라 사회운동에도 적용되는 일침이리라. 근대의 자본주의 이후, 인류적 차원은 오직 개인의 차원에서 확보되는 성질을 가진다. 보편성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그 어떤 것에도 매개되지 않고 홀로 가는 길에서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프간 탈레반으로부터 석방된 한국인 19명 전원이 2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사진제공; 민중의소리)     © 성남투데이

마침내 그들이 돌아왔다. 탈레반에 인질로 납치된 그들이 돌아왔다. 기쁘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한민족, 한국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가 겪은 일이어서도 아니다. 그들이 살아 돌아왔다 해서 그 기쁨은 민족이나 국가, 지역 하다못해 종교적 근거는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인류와 개인을 일치시킨 지점에서만 기쁜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기쁨이 실재를 비추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자기-반사적 정신(self-reflexive mind)의 ‘비판’을 묻히게 할 수는 없다.

이번 피랍사태의 과정을 통해 국가라는 것, 종교라는 것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한국의 교회,기독교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국가가 잘한 게 분명 있다. 종교에 대한 국가의 승리라 할 만하다. 국가가 종교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권력을 통해서다. 그러나 국가가 위험지역 선교를 금지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가의 오만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의 나라는 이 땅 위에 있지 않고 저 하늘에 있다 하지 않던가. 국가가 종교에 대해 패배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권력을 통해서만이다.

위험지역 선교를 무릅쓰는 교회의 노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아마 한국의 교회, 기독교는 살해된 이들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릴 것이다. 바로 종교사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피랍자의 고통을 겪다 살아 돌아온 이들도 아마 순교자에 준하는 대접과 평가가 이어질 것이다. 예수의 말처럼 종교는 국법의 초월, 이 세계의 초월에 관한 한 끈질긴 어떤 것이다. 이를, 국가가 권력인 한 국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피랍사태에 대한 한국의 교회, 기독교의 시각은 국가에 대한 종교의 승리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물론 종교의 승리로 국가가 손해보는 것은 없다. 종교는 권력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의 시민들 그리고 언론이 한국기독교의 선교방식에 비판이 거세다. 다른 민족이라는 현실이 내포한 역사적·문화적·심리적 차이 심지어 종교적 차이의 의미를 제대로 고려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단기 그리고 독선적인 해외선교가 문제임이 밝혀진 것이다. 국내에서도 대개의 시민들은 최소한 일 년에 몇 차례 한국의 교회, 기독교의 이런 무차별 선교에 부딪친다. 이 점에서도 한국의 교회, 기독교의 선교방식에 쏟아지는 최근의 사회적 비판은 의미가 있다. 한국기독교가 외면하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조차 종교라는 벽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 비판으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종교 비판이란 언제나 ‘최후의 비판’이 아니던가. 국법을, 이 세계를 초월하려는 종교는 국가도 어쩌지 못한다. 종교의 역사, 특히 보편성을 주장해온 종교들의 역사는 그것을 충분히 입증한다. 이 나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가 교과서에 삽입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오히려 국가는 흔히 보편성을 내세운 종교의 승리를 자인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무신론조차 종교에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심판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특히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을 말한다. 그 때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순교자라면 영생의 복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판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종교라고 예외일 수 없다. 한국의 교회, 기독교의 무차별 선교는 깊은 비판이 요구된다. 그것은 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가 있다든가 또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유들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적으로 규정한 탈레반의 결코 정당치 않은 폭력이나 우리가 목도하는 일부 종교적 광기와도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 비판의 최후는 계보학적 탐사에 있을 것이지만, 그 시작은 일상의 삶으로부터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평범함의 비판이 가장 날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럼 이런 비판은 어떨까. 자업자득이란 하던가. 그 누구도, 아니 그 무엇도 인과응보를 피하지 못한다. 자기가 지은 업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적 심판 못지 않는 인간의 비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 이전의 심판의 원리일 것이다. 그렇다. 한국의 교회,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들은 그런 일을 겪을 만한 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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