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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배우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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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배우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요즘…

〔벼리의 돋보기〕삶이 배우일 수 없다

벼리 | 기사입력 2007/09/13 [02:22]

명배우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요즘…

〔벼리의 돋보기〕삶이 배우일 수 없다

벼리 | 입력 : 2007/09/13 [02:22]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무관한 사회적 활동이나 직업에 대해서 고정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가령 예술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에 대해서 그/그녀로서의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가들’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비예술적인 예술가들이 이런 인상에 의존해 생존한다. 그러나 가장 반예술적인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이 예술로서의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예술의 역사가 입증한다. 이런 사람들의 인상은 일종의 무리 내지 떼거리 본능과 같은 것이다.

이런 동물적인 특이성은 자기 밖의 남과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편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런 편견이 계속 쌓이게 되면, 곧 많은 사람들이 온갖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면 부유함과 가난함, 성공과 실패, 명예와 비천함, 건강과 병이라는 구분이 뚜렷해진다. 이 구분은 곧 차별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부유함, 성공, 명예, 건강으로 구성하기 위해 그것들을 추구하는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질적이든 심리적이든 결코 삶은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단한 것이다.

이런 편견들이 바로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으로 구성된 사회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과 세상을 자기의 편견으로 대할 때 그것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남과 세상이 자신을 편견으로 대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이 점에서 세상은 아주 공평하다. 남과 세상이 자신을 편견으로 대할 때 그/그녀 역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그녀는 그/그녀가 아닌 것이 된다. 이제 그/그녀는 ‘배우’다. 배우가 주어진 캐릭터로 연기하듯 그/그녀 역시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그녀는 그/그녀가 아니라 배우로서만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 욕망 곧 자기를 축소하려는 욕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그녀가 어떤 캐릭터를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은 배우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그/그녀의 캐릭터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개성적이지 않다. 이제 이런 캐릭터가 ‘다수’를 이룬다. 떼거리로서의 다수는 곧 ‘고착’이다. 자기의 삶이, 삶들이, 그리고 삶들의 현실이 구조화되는 것이다. 배우의 캐릭터가 생산, 소비되며 생산과 소비는 확대된다. 이에 따라 현실이 더욱 고착된다.

이런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마침내 ‘명배우’가 탄생한다. 배우들 앞에서 서는, 배우들을 현혹하는 따라서 현실을 영화와 같은 의사현실로 만드는 배우가 등장하는 것이다. ‘현실효과’를 만들어내는 배우들 속의 배우, 명배우, 기막힌 역설이다. 이것은 ‘지배 없는 지배’다. 지배를 눈치 챌 수 없는 지배. 따라서 현실의 지배보다 더 무서운 지배다. 이것이 명배우 등장의 유일한 의미다. 다수 배우들의 공모 없이 명배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명배우와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이다. 명배우는 배우들의 세상, 그 퇴행성을 압축한 상징이다.

배우들이 편견에 의해 생존하듯 명배우 역시 배우들의 편견에 의해 생존한다. 그 역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닌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명배우들의 서식처는 정치, 경제 그리고 예술문화의 영역이다. 이들 영역에는 ‘탈(脫)’자가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이 전도는 배우들의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의사전도이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무서운 전도다. 최근 이들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련의 사회적 사태들은 이런 전도를 드러낸다. 무원칙한 정치실용노선, 휠체어 탄 재벌, 대학·문화·종교의 짜가소동, 그리고 집단적 광기들. 이런 일련의 사태에는 예외없이 배우들이 만들어낸 명배우들이 있다.

영원히 삶은 자기의 삶이다. 이 점에서 자기의 삶은 사회와 일치될 수 없고 사회로 전부 해소되지는 않는다. 편견이 아닌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과 세상에 대한 편견은 곧 자기와 자기 삶에 대한 편견과 같다. 그 편견은 삶들의 연대로 꿈틀거리는 사회장을 배우들의 무대, 명배우의 영화로 바꿔치기한다. 이것은 ‘복종’의 세상이다. 원하는 것을 원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삶이라면 편견이 난무하고 명배우가 등장하는 세상은 결코 자발적인 복종의 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근본문제는 이런 비자발적 복종을 극복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삶의 근본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검은 수렁에 깊이 빠진 한국사회. 그 구성성분인 지역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IMF가 주로 경제적 위기의 징표였다면 최근 일련의 사회적 사태들은 총체적 위기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한 개의 파이프가 아니라 여러 개의 복잡한 파이프를 타고 흐르면서 새어나오는 기름과도 같은 그것. 피폐해진 삶들이 언제까지 복종의 그늘 아래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임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명배우들의 정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요즘, 그것은 총체적 위기의 강력한 조짐이다.

‘삶이 연기일 수 없고 배우일 수 없다. 그것은 배우가 배우이어선 안 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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