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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녀의 누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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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녀의 누드까지…

〔벼리의 돋보기〕언론의 스펙타클

벼리 | 기사입력 2007/09/14 [07:45]

이젠 그녀의 누드까지…

〔벼리의 돋보기〕언론의 스펙타클

벼리 | 입력 : 2007/09/14 [07:45]
모든 시대 어디에서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역사상 왕을 대통령으로 바꾼 정치적 행동, 신이나 또 다른 절대적 우상을 사람으로 대체한 철학적 행동은 가치 있는 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가치는 익숙한 것을 낡은 것으로 보게 하고 그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현대의 삶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매체로서 언론이 세상의 ‘위선’을 까발리는 것만큼 자기의 존재 이유를 증거하는 것은 없다. 그저 밋밋한 평면의 거울로 세상을 반영하는 수동적 매체가 아니라 날카로운 무기처럼 세상을 찌르는 능동적 매체, 이것이 바로 언론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러나 언론은 우리의 믿음을 자주 배신한다. 우리는 아예 뻔뻔스러운 얼굴로 굳어진 언론들을 알고 있다. 언론의 배신은 수동적으로만 세상의 위선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기능에서 비롯된다. 순종, 침묵, 야합과 같은 덕목들은 그들의 생존조건. 언론이 아닌 바로 언론사로서, 언론권력으로서. 그들이 어떻게 말을 하고 그 말을 어떻게 꾸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치장일 뿐이므로.

오히려 언론이 세상보다 더 위선적이다,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의 은폐된 덕목들과 결부되어 그들 고유의 작동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언론의 작동은, 생산이 아니다, 소비의 차원이다. 생산 차원이라면 그야말로 노동자들처럼 집단적 대응이 가능하겠지만, 소비 차원이라는 점에서 개인 수준에서 신문을 끊거나 채널을 돌리는 게 일반적이다. 아직은 저항이 무력한 것이다.

또 언론은 세상의 다양성이나 그때그때의 특이성이 아닌 상투적인 모델을 만들기도 하며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스펙타클 곧 구경거리로 만드는 기술을 작동한다. 이는 매체로서 그들만의 코드화이며 매체의 소비자들을 겨냥한 스펙타클의 창조다. 게다가 이런 코드화, 스펙타클에는 예외없이 언론이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스며 있다.

기술이 능한 언론일수록 광고가 몰려든다. 돈이 돌려든다. 언론이라기보다 언론사로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코드화, 특히 스펙타클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알쏭달쏭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 알쏭달쏭은 가짜가 진짜보다 과잉되기도 한다. 이 정도라면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기까지 한다.

최근 신정아사건 보도를 보면 언론이 이런 위험을 보인다. 마치 그녀는 희대의 스캔들 여주인공, 국가와 예술후원자들을 농락하고 다닌 희대의 악녀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진실을 추구한다며 남녀관계의 특수성, 예술의 특수성이 무시되고 거의 정치적 의미로만 포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신정아라는 기호는 어느 새 ‘게이트’라는 기호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어떤 언론은 그녀의 누드 사진까지 까발렸다. 누드 사진처럼 생생한 메시지가 어디 있는가. 이제 그녀는 언론을 통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거대한 스펙타클로 창조되었다. 스펙타클의 해악은 비판적 거리두기에서 그 거리를 없앤다는 점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즐기기만 하는 구경꾼으로 전락된다는 데 있다.

그녀의 누드 사진을 까발린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미술판에서 자신의 누드를 사진에 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누드를 미적 작업의 과제로 삼는 예술가들도 있다. 언론의 스펙타클 창조가 예술 자체의 문법까지 짓밟는 그야말로 ‘문화적 야만’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다.

정치권에선 의심할 수 있더라도 의심이 전제하는 가정이나 관련 근거의 제시 없이 몸통이니 하는 섣부른 의혹 부풀리기가 다른 합리적 판단들보다 앞장선다. ‘정권교체기’라며 언론은 그대로 순응한다. 심지어 그녀의 누드 사진까지도 까발린다. 이것은 ‘공적 살인’이 아닌가! 스펙타클의 창조, 스펙타클을 창조한 언론 그 자체다.

신정아라는 기호의 핵심은 두 가지. 그녀의 ‘위선’이며 이 위선은 학력위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녀와 청와대 관계자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연관에서 위선의 ‘정도’와 그 ‘실체’다. 이 두 개의 핵심을 찌르고 철저히 까발리는 것, 나아가 필요한 사회적 의미를 담론하고 사회적 성찰과 대응을 촉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이다.

스펙타클에 대해 기 드보르는 “대결능력의 실패이자, 환각적인 사회적 사실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 이렇게 대꾸할 수 있을 것이다. “대결하자, 그 무기는 실재적인 사회적 사실, 이에 기초한 진실이다.” 우리는, 삶은 결코 구경꾼으로 전락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글 역시 이런 대결의 한 가지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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