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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엽, 절망의 지방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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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엽, 절망의 지방자치

〔벼리의 돋보기〕올해 마지막 돋보기입니다

벼리 | 기사입력 2007/12/27 [22:17]

이대엽, 절망의 지방자치

〔벼리의 돋보기〕올해 마지막 돋보기입니다

벼리 | 입력 : 2007/12/27 [22:17]
아무리 쓸 만한 말이라 해도 그 말에 취하지는 않습니다만, 종종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란 말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는 뜻이지요.

불가에선 자신의 삶에 대해 길들여지지 않고 깨어 있으면 곧 부처라는 경계를 가리키는 말로 곧잘 쓰이지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때 이 말처럼 아픈 회초리가 되는 말도 없더군요.

▲ 사이비정치에 불과한 익명의 정치가 아니라 늘 ‘그 사람의 정치’를 꿈꾸고 실현되기를 바라기에 성남시장 이대엽씨, 그가 수장으로 있는 성남의 지방자치로부터 올해도 절망을 느꼈습니다.    ©성남투데이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성남시청 대회의실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성남시의회가 폐회연을 열었습니다. 그날 시의원, 공무원, 기자 등 여러 사람들 틈에 낀 제 앞에 다가선 성남시장 이대엽씨가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야 돼!”

순간, 우스웠습니다. 그 말뜻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남시장 이대엽씨에게 제가 매우 불편한 존재로 어쩌면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새겨졌고, 그런 그의 감정이나 생각이 드러난 말임을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왜 응대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 말길도 어디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가령 그의 시장직 수행과 관련해서도 이렇게 저렇게 바늘 꽂듯이 응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그가 드러낸 사람의 격에 맞춰 비아냥으로 응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응대할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깔린 그의 마음 경계를 읽었던 까닭입니다. 제게 읽힌 그 경계는 정말이지 하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경계에다 대고 무슨 응대가 필요하겠습니까.

기자들은 물론 지역의 왠만한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대엽씨의 언론관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시청 브리핑룸을 없애고, 언론을 회피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입증되고도 남는 것이지요.

이런 그의 언론관의 심각한 결함을 지적하는 이유는 언론하는 제가 “나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야 될 사람”으로 그에게 새겨진 것이 제가 그에게 새겨질 만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제가 그에게 새겨질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언론행위 자체는 속성상 비판자임을 포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곧 언론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할 뿐 아니라 자명한 것을 거리두기라는 독법을 통해 낯설게 하는 일이지요.

특히 후자는 언제나 이미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세상사를 미리 낯설게 함으로써 그 충격을 완화하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성찰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지요. 말하자면 나중에 깨닫게 될 일을 미리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중에 불편해지고 불편 이상의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을 치르기 전에 그것을 예고하고 미리 불편함을 자초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언론하는 제게 그가 불쑥 내뱉은 말은 그의 하잘것없는 마음 경계를 알아차리게 할 뿐입니다. 그의 잘못된 언론관을 자신에게 스스로 용인함으로써 새겨두지 않아도 될 사람을 새겨두는 그 경계 말입니다.

새겨두지 않아도 될 사람을 새겨두는 사람은 마주치는 경계마다 마음을 붙들어두는 사람일 뿐입니다. 마음이 경계마다 머물고 끄달리는 사람은 머물지 않고 끄달리지 않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는 탓이죠.

특히 공공영역에 몸담은 공인은 마음에 경계를 둬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과 사람을 구분해 일을 봐야지 사람을 봐서는 안 됩니다. 온 사회를 이끌어야 할 정치가 우리 사회에서 고작 경제로 전락되고 우리 성남에서 행정으로 전락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정치가를 언론이 우습게 볼 수밖에요. 그렇다고 그 언론이 그런 정치가를 한 순간이나마 마음에 새겨두기나 하겠습니까. 앞서 ‘응무소주이생기심’이란 말을 들어올린 것도 이런 이유였지요.

그러나 제 마음을 모으곤 하는 이 말도 새겨둘 말은 못됩니다. 어느 옛사람은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入處皆眞)’이라 받아친 까닭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니 모든 자리가 다 참이다”는 뜻이겠습니다.

사이비정치에 불과한 익명의 정치가 아니라 늘 ‘그 사람의 정치’를 꿈꾸고 실현되기를 바라기에 성남시장 이대엽씨, 그가 수장으로 있는 성남의 지방자치로부터 올해도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성남에도 지방자치의 희망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저무는 해가 가면 희망찬 새해가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절망은 반짝이는 의미로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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