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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성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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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성공하기 어렵다

〔벼리의 돋보기〕정치적 보수주의는 가능한가

벼리 | 기사입력 2008/02/04 [00:30]

보수는 성공하기 어렵다

〔벼리의 돋보기〕정치적 보수주의는 가능한가

벼리 | 입력 : 2008/02/04 [00:30]
오래 전 일이다. 성남의 초대 민선시장 선거를 앞두고 관선시장 출신의 오성수씨가 유권자들 앞에서 “보수세력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리만 한 마디 했을 뿐 무엇이 보수인지, 보수세력이 무슨 일로 똘똘 뭉쳐야 하고, 똘똘 뭉쳐서 뭘 하자는 건지 이어져야 할 소리들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보수세력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곧 자신을 찍으라는 사사로운 의미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구청장 출신의 김모씨에게 공천을 빼앗기고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선되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생뚱맞게 말한 보수라는 지반 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인 영향력으로 볼 수 있는 선심정치라는 지반 위에서였다.

지역에서 겪은 황당한 사건이지만 어디 이런 일이 한두 가지일까. 게다가 이런 사건은 시간을 넘어 반복해서 일어난다. 아무튼 오성수의 경우는 한국정치에서 보수의 이름을 내걸고 튀어나오는 주장들, 행위들에 대해 가슴에 와 닿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판단을 믿음으로 끌어올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있으나 정작 표방되는 그 보수가 없다는 점에서.

곧 보수를 일관되게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핵심적인 이유에서다. 한국정치에는 정치적 보수주의가 없다.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있으나 보수 그 자체인 정치세력은 없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보수세력은 무늬뿐인 보수세력에 불과하다. 보수를 표방하며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적 패거리라는 뜻이다.

한국정치에서 보수는 뿌리가 없다. 뿌리없는 나무다. 보수정치의 모델로 예시되는 영국이나 미국, 일본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교적 체제안정적인 보수로서 유지돼 오는 것은 정치·경제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제국주의 맹주국가로 군림해온 데 있다. 식민지와 종속적 근대화를 거쳐온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영국의 경우 성공회와 국왕, 일본의 경우 신도(新道)와 천황, 미국의 경우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요인이 추가될 수 있다. 이들 요인은 보수를 유지하는 뿌리 깊은 에토스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는 이런 정치·경제적, 종교적인 토대가 없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보수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뿌리없는 나무라고 말하는 이유다.

하긴 보수정치 모델에 과연 정치적 고유성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보수주의는 이론 자체가 없다”(칼 만하임)고 하는 시각이 대표적인 반론이다. 이론의 부재는 곧 사유의 부재가 아닌가. 따라서 보수는 정서적, 기득권적 고집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보수정치의 모델은 합리적인 사유를 우습게 여기는 종교적 파토스, 집단주의적 정서가 두드러진다.

이런 경직성이 강화되고 여기에 대항세력이 미약하거나 부재할 때 보수는 집단적 광기에 빠져들기도 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경우다. 이들 나라는 대중선동가들이 민중을 현혹하고 현혹 당한 민중의 집단적 최면을 바탕으로 나치즘, 파쇼즘 따위의 전체주의로 이행하지 않았나. 이런 사실(史實)에 비쳐볼 때 한국사회의 최근 상황은 우려스러운 데가 있다. 닮아간다는 조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구나 일본과는 전혀 다른 토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이 재해석을 거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척도로 삼을 수 있는 유·무형의 전통자산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전통자산은 그것이 모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정치에서 거의 유일한 보수의 뿌리로 삼을 수 있는 보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보수세력은 이와는 전혀 무관했다.

전통자산은 보수세력에게 무시하고 짓밟는 어떤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시 도입되는 경우조차 정치적 수사나 박제화된 어떤 것에 불과했다. 한국정치에서 보수가 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고 사대주의로 이미지화된 것은 이런 이유들에서다. 이 점에서 한국의 보수는 서구나 일본의 보수와는 달리 짜가보수일 뿐이다. 대중적 인상 역시 다른 나라들의 보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부정적이다. 바람 잘 날 없었던 게 이 땅의 보수세력 아니었나.

이는 한국의 시장경제가 졸부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로 냉소받는 것과 유사성이 있다. 주목할 것은 보수가 끈을 놓지 않는 유일한 토양이 이 냉소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이 고리가 최근 정권교체 이후 노골적으로 깊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지점이다. 대선 당시 지지의 이탈과 사회적 저항을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정치권력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보수세력과 졸부자본주의가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정치에서 보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진보를 표방해온 민주노동당은 대선을 계기로 소멸 위기에 처했다. 보수에서 중도에 걸쳐 있는 통합신당의 사정도 최악이다. 한나라당 없이는 그 의미를 구할 수 없는 창조한국당은 지금  소수세력으로 보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그렇다면 보수세력은 제대로 된 보수, 정치적 사유와 실천 양면을 통해 정치적 보수주의로 탄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다.

이 시작에서 중심에 있는 한나라당은, 그러나 불안하다. 통치 정당성의 기초로 말해지는 보편성에 미치지 못해서다. 국민적 동의와 복종에 제약을 가하는 지도자를 선택했다는 이유에서, 또 그를 중심으로 한창 선 보이고 있는 예비적 통치 양상이 대중적 불안을 유발하기 시작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분리될 수밖에 없을 동상이몽의 세력다툼 또한 무시 못할 요인이다. 여기에 이미 분리된 이회창당의 경쟁이 가세한다.

누구누구 줄대기와 선거공학 수준의 유권자 접근 양상을 보이는 대다수 총선 출마예정자들의 동향을 봐도 그렇다. 상황의 전개양상은 정치적 보수주의로 탄생할 수 있는 호기를 보수세력이 이전투구 패싸움으로 퇴락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시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정권 장악을 넘어서고 또 누가 원조보수냐 하는 저급한 선거투쟁을 넘어서서 체제안정적인 보수의 탄생 시도는 전혀 없는 셈이다.

이런 이유에서 단기간 안에는 보수세력이 체제안정적인 정치시스템을 유인하고, 그 정치의 안정적인 한 축을 추동할 공고한 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4월 총선을 통해서, 그 결과와 그 의미를 따지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한국정치에서 보수의 가능성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정치적 보수주의의 가능성, 현재로선 회의적인 전망이 우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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