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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MB와 영혼없는 실용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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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MB와 영혼없는 실용주의자들

〔벼리의 돋보기〕숭례문 그리고 한반도운하

벼리 | 기사입력 2008/02/17 [19:26]

불안한 MB와 영혼없는 실용주의자들

〔벼리의 돋보기〕숭례문 그리고 한반도운하

벼리 | 입력 : 2008/02/17 [19:26]
이념은 보편적인 어떤 것이다. 이 보편적인 이념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해도 칸트식으로 말해서 인간의 삶과 사유를 규제하는 어떤 것이라면,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은 이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유일한 이념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리라. 이 이념이 우리를 사로잡는 한, 우리는 사회 속에서의 자유를 꿈꿀 것이고 이 꿈은 불가피하게 자유로운 사회라는 꿈과 짝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 꼴리는 대로 하는 ‘방종’은 자유가 아니다. 자신만을 위한 자유인 방종은 무엇보다 남을 수단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남을 종 부리듯 하는 제왕적 권력자나 기업의 CEO는 현대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방종의 표본일 듯싶다. 남을 수단 삼는 것, 그것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반인간적인 행위이다. 인간은 인류라는 유적 존재로서만 인간이라는 사실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면 자유는 ‘호혜(互惠)’내지는 호혜적 교환에서만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남으로부터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접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남 역시 나로부터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접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목적으로 대접한다는 것은 곧 남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접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호혜적 교환은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고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보살피는 일에서 잘 드러난다.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는 것은 무엇을 바래서가 아니다. 무엇을 바래서가 아니어서, 바로 이 핵심적인 이유에서, 자식은 자라서 부모에게 ‘은혜’나 ‘부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에 자식은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되돌려주게 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보살피는 이른바 호혜의 교환이 성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 앞에 보이는 남만 남인가. 아니다. 현재의 남만이 아니라 과거의 남, 미래의 남 모두가 남이다. 따져볼 것도 없이 오늘의 산자는 사자(死者)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산자가 후대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는 짓을 함부로 해서 안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인간의 본질적 삶을 규제하는 자유의 문제에서 산자의 권리뿐 아니라 ‘사자의 권리’, ‘미래세대의 권리’가 동급으로 다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탈레반에 ‘세계인’은 공분을 느끼는가. 문화유산이야말로 산자가 사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현재의 것이자 미래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문화유산은 ‘과거와의 대화’일 수밖에 없다.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포함되는 ‘영속성’의 관점에서 문화유산을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대로 된 ‘보존’을 통해 문화유산을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말 그대로 남겨진 의미를 곱씹어보지 않은 채 어설픈 ‘복원’이나 돈벌이에 급급한 ‘관광자원화’로 문화유산을 말살하는 행위에 반대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저급한 행태들은 문화유산을 수단으로 삼는 태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산업화 이전 우리 사회에서 자연은 잘 보존되어 왔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경제양식,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당연시하는 생활양식이 지배적이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가치관을 모두가 심성화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자연철학자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그침(止)’은 자연의 이치이자 세상사가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이치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전통의 삶이 자본주의적 삶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아, 숭례문! 우리의 보물 1호로 남겨진 숭례문이 검은 재로 변했다. 화마의 결정적 책임은 이명박에 있다. 서울시장 당시 보존대책이 전제되지 않는 전시성 개방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잘못했다’는 시인과 사죄가 우선 아닌가. 오히려 그는 ‘국민모금 제안’으로 사기를 쳤다. 왜 사기인가. 온 국민이 공분하는 비상사태에 책임지고 대응하는 국가의 논리가 아닌 가국(家國)에서나 볼 수 있는 ‘왕의 논리’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수위가 국민모금운동을 하겠다며 아부를 떨었다. 이들의 아부는 ‘굴종’에 다름 아니다. 이명박에 굴종을 일삼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이들은 ‘영혼없는 실용주의자들’이라 부를 만하다. 맑스가 남긴 말이 이들에게 적격이겠다.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까지 믿고 있다.”

한반도운하, 이 무슨 소리인가! 경제논리를 내세운 이명박의 사업이다. 요컨대 그것은 현재의 우리와 공존하는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며, 과거의 조상이 고스란히 남겨준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며, 미래의 후대에게 우리 역시 고스란히 남겨줘야 할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에게 밀어붙일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방종에 불과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두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따라서 모두를 희생시키고 만다는 점에서다.

국보 1호 숭례문 전소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해 이명박이 보여준 왕의 태도와 그를 왕처럼 떠받드는 인수위의 굴종적인 태도로부터 우리 사회의 안전이 도전받는다는 위기를 강하게 느낀다. 또 그가 밀어붙이겠다는 한반도운하가 사회의 토양이자 짝인 자연의 안전을 깨뜨린다는 위기도 강하게 느낀다. 결국 과거, 현재, 미래 모두의 자유가 도전받는다는 위기를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안하고 불안하다.

이명박을 찍고나서 보니 ‘아니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 간판으로 한 자리 해보겠다는 생선가게 파리떼 같은 풍경을 본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풍경 속에 이명박의 선택이 자신인 아무개라고 쓴 대형현수막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거리낌없는 현수막 구호의 등장은 상징적이다. 생선가게 파리떼에게는 그들의 선택권자인 ‘민’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은 변심 중이다.

핵심적인 의문을 느낀다. ‘이명박과 그를 떠받드는 영혼없는 실용주의자들, 과연 이들은 정권교체 결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집권세력인가?’ 아무래도 아닌 듯하다. 대선 이후 지금까지 짦은 기간임에도 이미 보여준 것만으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기댈 수 없고 굴종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우리가 자유라는 이념을 망각하지 않은 한, 정권을 장악한 이들의 출발은 지나치게 저급하고 또 너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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