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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단지 하나의 관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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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단지 하나의 관점일 뿐

[벼리의 돋보기] 중용, 그게 뭔데?

벼리 | 기사입력 2005/03/02 [00:11]

중용? 단지 하나의 관점일 뿐

[벼리의 돋보기] 중용, 그게 뭔데?

벼리 | 입력 : 2005/03/02 [00:11]
▲ 벼리     © 성남투데이
누군가 ‘진리’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진리의 화신인양 믿어서는 안된다. 이름과 실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 누군가 '중용(中庸)의 미덕'에 대해서 말했다고 치자. 그 미덕을 역설하기 위해, 가령 중용에 대해 주자 같은 권위 있는 도학자의 풀이를 소개하거나 또는 논어의 ‘과유불급(過猶不及, 先進篇)’이나 주역의 ‘불과(不過, 繫辭轉上)’을 인용하며 그 뜻을 들려주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가 중용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착각해선 안된다.
 
더구나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치 않다. 설령 그것이 뭇사람으로부터 지적 권위를 인정 받는 고전이나 저술가로부터 가져왔다고 해도, 그것이 전거(典據)가 되는 까닭은 엄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이에게는 고전이 진리의 기준은커녕  “지나치게 추켜세워 숭상한 말”(焚書, 童心說)로 판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고전이 자기의 삶과 사유 속에서 녹아 들지 않거나 음미 되지 않은 경우라면 고전은 결코 제 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투적으로 이용될 우려도 높다. 이 나라의 언론은 고전 특히 유학의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 이런 사례를 적지 않게 제공하며, 소위 글쟁이라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적지 않다. 이 경우는 고전이 문제가 아니라 고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가 된다.
 
그럼 다시 중용의 미덕으로 돌아가보자. 중용은 특히 동양의 유학에서 전통적으로 강조되어온 덕목이며 서양의 고전 그리스인에게도 강조된 덕목이기도 하다. 중용의 미덕은 ‘절제’나 ‘균형’, ‘조절’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하자. 중용의 미덕은 사상사적으로 늘 공격 받아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탁오 이지, 에피쿠로스, 프리드리니 니체, 최근에는 질 들뢰즈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중용을 주창하는 자는 반드시 ‘양극단’이나 ‘흑백’을 상정하고 그것을 ‘악덕’으로 깎아 내린다. 그래야 윤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중용의 미덕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령 흑이 백과 중용을 양극단으로 치부하고 자신을 중용의 지위에 추켜세우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쉼 없이 변전하는 삶에서 ‘개념적으로’ 양극단을 전제한 특정 관점을 중용으로 간주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양극단이란 역으로 중용을 주창하는 자가 조작한 ‘허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점은 단지 하나의 관점이란 지위를 갖는다. 만약 어느 하나의 관점이 ‘독점적인 지위’에서 다른 다양한 관점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예컨대 양극단이나 흑백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조작’일 뿐이다. 이 조작은 독점적 지위를 내세우는 어느 하나의 관점이 다른 다양한 관점을 압살하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 같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불렀다. 무수한 차이들을 압살하는 ‘동등화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간파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중용의 미덕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미덕을 하나의 관점으로서만 긍정하려는 것이다. 독점적인 지위를 내세우지 않는 한, 중용의 미덕은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용의 미덕은 개인의 윤리나 철학 차원에서는 사람에 따라 깊이와 넓이도 있다. 또 생리적으로 사람의 몸은 중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하나의 관점으로 수용될 수 있다. 
 
중용의 미덕은 특히 사회적인 맥락에서 도전 받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윤리나 철학을 넘어 사회적인 맥락에서 주창되는 경우 거의 예외없이 상투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을 여과없이 판단하거나 생각의 연쇄를 놓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인 맥락에서 중용의 미덕은 거의 대부분 그럴듯한 외관과는 달리 속으론 '편견'과 '오류'에 기초해서 제출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담론에서 중용의 미덕은 조작을 통해 설정된 양극단이나 흑백이란 지점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난다.

사회적인 맥락에서 중용의 미덕은 세력적으로 주류의 무기로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의사주류도 포함될 수 있다). 이유는 그들은 ‘타협’과 ‘통합’을 외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타협이나 통합은 무작정 긍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긍정과 부정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리 포착되어야 한다. 자칫 타협이나 통합을 미끼로 ‘꿈’과 ‘원칙’을 압살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중용의 미덕이 사회적으로 긍정되는 경우는 오직 다른 것을 끌어안는 '포용'에 있다. 포용은 타협과 통합보다 우선적이며 본질적이다. 이 점에서 비주류의 논리를, 자신의 존재조건인 비주류의 존재를 망각하는 주류는 질문과 '의혹'의 대상이다. 중용의 미덕을 외치는 주류가 극단으로 조작하는 비주류의 논리는 변전하는 사회상과 사회적인 꿈을 포착하는 경우가 많고, 비주류의 존재가 왜곡된 현실에 저항하는 독기를 잃지 않는 경우 역시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주류의 논리, 비주류의 존재는 주류의 논리, 주류의 존재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을 때 이 한계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구악’을 ‘신악’으로 대체하는 결과에 다름아니다. 비주류의 논리와 그 존재의 의의는 ‘미끄러지고 틈을 벌리는’ 일이다. 비주류의 운명이란 쉼 없이 영원히 걷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대로 된' 비주류의 양상은 삶의 모습과 일치한다. 비주류에게 중용의 미덕이란 단지 하나의 관점, 하나의 태도로서만 드물게 찾아올 뿐이다.
 
아마 한국사회는 상투적 수준에서 행사되는 중용의 미덕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익숙한 접속 속에서 비로소 삼류사회의 딱지를 뗄 수 있을 것이다.
 
기사에 덧붙이는 말: 

왜 이 글을 썼을까. 성남투데이에 실린 성남상공회의소 김주인 회장의 글을 읽고 소감이 없지 않아서다. 반만 했다. 이 반도 실은 글로 드러낸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들이 있으나 그저 몇 가지 지점만 살폈다. 누군가 다른 반을 감당했으면 좋겠다. 그 반의 ‘문제설정’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비롯될 수 있겠다.
 
“천성산사태는 솔직히 말해서 한편의 코미디라는 생각이 든다. 풀벌레 하나도 생명을 중히 여겨는 불가의 정신은 존중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롱뇽 몇 마리를 살리겠다고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결국 수조원이 들어간 국책공사를 중단시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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