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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만이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는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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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만이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는 기호

〔벼리의 돋보기〕 <화려한 휴가>, 김지훈, 그리고 우리들

벼리 | 기사입력 2007/08/15 [14:46]

‘5백만이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는 기호

〔벼리의 돋보기〕 <화려한 휴가>, 김지훈, 그리고 우리들

벼리 | 입력 : 2007/08/15 [14:46]
<화려한 휴가>의 감독 김지훈이 14일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해서 말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다. 인터뷰는 “5·18은 영화보다 더 눈물 없이 볼 수없는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대화인 셈이다. 다른 이도 김지훈과 다른, 다른 방식의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화려한 휴가 영화 포스터.     © 성남투데이

-왜 ‘80년 광주’를 다루겠다고 생각하셨나요.

“대구에서 자란 뒤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5·18을 알았어요. 10살 때 광주항쟁이 일어났는데 당시엔 ‘폭동’으로 알았어요. 어린 마음에 ‘나라 망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꽤 했죠. 훗날 비디오, 책, 자료 등을 통해 진상을 알고는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몰랐다는 것뿐 아니라 아예 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도 부끄러웠지요. 훗날 내공이 쌓이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죠.”

↔김지훈은 광주항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시공간적인 거리를 염두에 두고 그렇다. 10살 김지훈에게 광주항쟁은 ‘나라 망하는 폭동’. 따라서 그에게 시민군과 계엄군, 광주시민과 반란군은 ‘전도’되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은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 진실이 은폐되는 사례를 김지훈은 제공한다.

↔김지훈은 광주항쟁을 간접 체험했다. “훗날 비디오, 책, 자료 등을 통해 진상을 알”게 되었고, 그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 “굉장히 부끄러웠”다. “몰랐다는 것뿐 아니라 아예 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도 부끄러웠”다. 그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몸으로 아는 것이  ‘맹자왈, 공자왈’로부터 아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김지훈의 사례는 제공한다.

몸으로 안다는 것은? 온 몸, 온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고 따라서 실천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배움이 아니겠는가. 왕양명의 ‘신심지학(身心之學)’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니체가 말했듯이 몸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몸으로 안다는 것은 체험하는 만큼 아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간접 체험한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화려한 휴가>는 개봉 20일만인 13일 현재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의 거리를 좁히는 만큼 이들은 제2, 제3의 김지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김지훈, 또 다른 김지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체험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실천한다. 김지훈이 광주항쟁을 <화려한 휴가>로 부활시켰듯이, 다른 김지훈들은 광주항쟁의 다른 부활을 만들어낼 것이다. 다르게, 아주 다르게, 아주 기가 막히게!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나요.

“자료집, 책, 다큐 등도 봤고요. 당시 생존자들의 인터뷰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많은 사람이 보게 해달라’고 말했지요. 광주항쟁은 지금까지도 광주만의 역사처럼 평가받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5·18의 전국화’를 모토로 삼았죠.”

↔김지훈에 따르면 그 어떤 자료보다도 당시 생존자들의 인터뷰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화려한 휴가>를 제작하는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는? 역사적 사건의 간접체험과 직접체험 사이의 간극을 좁힌다. 당시 생존자들의 인터뷰가 지닌 의미, 가치는? 삶의 직접성, 그 직접적 삶의 그 무엇과 관련된 것이다.

“현실 속으로 도약하는 것이, 현실 속으로 빠져들고 현실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식”(안토니오 네그리)이라 하지 않던가!

↔김지훈에 따르면 그분들, 김지훈이 광주항쟁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화려한 휴가>를 제작하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당시 생존자들은 그에게 이구동성으로 ‘많은 사람이 보게 해달라’고 말했다. 아, 이제 알겠다. <화려한 휴가> 마지막 장면에서 간호사 박신애가 왜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기억의 요구를 했는지. 그것은 바로 당시 생존자들의 요구가 아니던가! 그 요구란? ‘망각’이 아닌 ‘모두의 기억 되기’!

그렇다. 광주항쟁은 당시 생존자들, ‘그분들’만의 것은 아니다. 광주항쟁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결코 역사는 연대기이거나 연대기 속에 감춰진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공간, 시간의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을 때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 된다. 비로소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마주쳤을 때 망치처럼 골을 때린다. 그 때 그것은 유일한 ‘모나드(單子)’로 서고 ‘정지된 현재시간’으로 달려든다. 그 때 사건, 역사적 사건은 ‘메시아’가 된다.

따라서 광주항쟁은 ‘5·18의 전국화’를 통해서만 역사가 된다. 바로 모두의 기억 되기!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가 된다. <화려한 휴가>는 ‘5·18의 전국화’라는 모두의 기억 되기를 수행 중이다. 광주만의 역사처럼 평가받는 공간 한계를 극복하고, 생생한 영화적 재현을 통해 광주항쟁을 현재시간으로 고정시킴으로써 시간 한계를 뚫어내고 있는 것이다. 광주항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나중 사람들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과 연결하는 유일무이한 역사 체험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5·18이 전국화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변신해 있을까?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아마도 권력질서 속에서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올 구멍-“미래 속에서는 매 순간들이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문”(발터 벤야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떠밀릴까? ‘세게, 세차게!’ 그 때 우리는 아마 이렇게 외칠 것이다. ‘더 세게, 더 세차게!’

-영화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도 없지 않습니다.

“왜 감독의 생각이나 정치적 색깔이 없냐, 당시 상황의 재구성에만 멈췄냐 하는 비판도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27년간 5·18에 대해 고민했던 분들이 그렇게 많았다면, 역으로 지금까지 그분들은 뭘 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5·18은 지식인이 소유한 역사가 아닙니다. 이건 존재의 역사입니다. 혹자는 감동을 주기 위해 눈물을 넣은 ‘신파’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5·18은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대중영화는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참여의 역사’가 이뤄지는 방법입니다.”

↔ 김지훈은 27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5·18이 존재들(존재하는 자들, 존재자들, 바로 우리들!)의, 말하자면 모두의 5·18이 되지 못한 책임을 묻고 있다. 누구에게? “왜 감독의 생각이나 정치적 색깔이 없냐, 당시 상황의 재구성에만 멈췄냐 하는 비판”자들에게. 바로 그들은 지식인이다. 김지훈은 이 점에서 ‘비(非)지식인’ 계열에 속한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범주로서 지식인은 이미 파산선고를 당했다. 지식인의 죽음, 그것은 김지훈식 표현으로 삶의 현장에 놓인 존재들로부터 일탈한, 그리고 자기 삶의 현장의 존재로부터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후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죽은 시체들’!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이랴!

오히려 지금은 ‘사이비’가 판을 친다. 어용과 관변이 판을 친다. 그리고 겉으로는 ‘비판’,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는 가면을 쓴 자들이 있다. 사이비들! “왜 감독의 생각이나 정치적 색깔이 없냐, 당시 상황의 재구성에만 멈췄냐”는 ‘비판자들은 사이비들이다. 사이비는 죽은 시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김지훈은 “5·18은 지식인이 소유한 역사가 아니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언이자 확신이다. 부정은 긍정을 불러들인다. 김지훈은 5·18은 “존재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언이자 확신이다. 이 부정과 긍정을 통해 그는 5·18이 모두의 기억, 모두의 역사가 되는 근거를 구하고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들이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자들, 존재자들, 바로 우리들은 누구인가? 노동인가? 노동은 돈 냄새가 난다. 아니 악취가 난다. 이데올로기인가? 진보, 보수, 그 무슨 주의?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 적도 없다”(질 들뢰즈). 권력인가? 크든 작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권력은 우상이다. 투쟁은 결코 권력을 구하지 않는다.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누구인가? 삶 그 자체, 삶의 활동 그 자체다. 우리들은 결코 한결같지 않다. 서로 다르다. 우리들은 남을 압제하지 않으며 압제받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의지하는 데로 살아갈 뿐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며, 그러면서 변신할 뿐이다. 이런 우리들의 변신, 그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5·18이다.

보다 나은 삶에 필수적인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들이 나설 때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처럼, 삶의 근본조건인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학살의 잔혹함에 맞서 싸운 것은 혁명의 원형질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모든 혁명은 삶을 반대하는 현실에서 비롯되며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김지훈식으로 말해 5·18이 결코 ‘지식인이 소유한 역사’가 될 수 없고, 존재들의 ‘참여의 역사’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지훈은 “5·18은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실제는 영화보다 더 리얼한 법이 아닌가. 그랬다. 내가 그랬고, 지난 80년대 나와 함께 걸었던 모든 친구들에게 “5·18은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와 우리들은 지난 80년대 내내 5·18과 함께 살았다.

영화는 또 다른 실제를 창조한다. 고백했던 것처럼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 “당장 총을 들고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어 군인들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이 두 가지를 들어 나는 <화려한 휴가>가 불러일으키고 내가 반응한 ‘강렬한 감응’이라며 ‘전부’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인터뷰의 다른 대목에서 김지훈은 “감독은 아름다운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영화 같은 말이다. 그 ‘아름다운 거짓말’에 호응한 관객으로서 우리들은 5·18광주항쟁 당시 반란군들이 자행한 학살에 대해서 ‘추한 진실’이었다고 말한다. 역사가 정지된 현재시간으로 마주칠 때, 역사는 이렇게 선연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 추한 진실은 무엇일까. 잔혹한 ‘학살’, 학살의 ‘잔혹함’이다. 다른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삶의 부정, 삶의 근본조건인 생명의 부정이다. <화려한 휴가>에서 또렷하게, 너무나 생생하게 본 것이다.

잔혹함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이 연민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 아니겠는가. 해악과 사랑, 연민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물며 그 해악이 학살임에랴! 반란군들이 광주시민에게 자행한 학살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사랑하고 연민하는 이웃들이 입은 해악, 천인공노할 그 잔혹함을 생생하게 느꼈다!

김지훈의 지적에서 나오듯 신파를 운운하는 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일까? 현실에 기초해 만든 <화려한 휴가>를, 현실에서 흘린 ‘피 같은, 피 보다 더 붉은’ 눈물에 기초해서 만든 <화려한 휴가>를 현실에서, 현실의 피눈물에서 분리하려는 자들 아니겠는가. 역사적 현실에 기초한 <화려한 휴가>를 역사적 현실에서 분리하려는 자들 아니겠는가. 신파라니?! 대체 그들은 <화려한 휴가>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학살의 ‘잔혹함’을 보지 않고 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정권교체를 염두에 두고 ‘시기’를 운운하는 자들 역시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만을 사유한다. 따라서 탐욕 그 자체에서 비롯된 천박한 주판알 퉁기기를 적용한다. 시기 운운하는 자들에게 인터뷰를 통해 김지훈은 답한다.

-광주항쟁을 대중영화로 풀어내기에는 조금 시기가 이른 게 아닐까요.

“왜 ‘역사적 사건’을 대중적 형식으로 풀어냈느냐는 문제로 돌아가네요. 5·18의 아픔은 다름 아니라 망각, 왜곡입니다. 그래서 치유가 안 됩니다. 5·18은 공식적으로 민주항쟁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이 없습니다. 행사 하는 날만 잠깐 관심을 갖습니다. 일부에선 여전히 폭동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어요. ‘화려한 휴가’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더 큰 대의와 미덕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잘못 인식하거나 모르는 분들에게 올바른 관점을 제공했다는 거죠. 전 광주를 영화로 풀어내는 시기가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몰랐던 역사를 알아서 행복하다’는 젊은 관객의 편지를 받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중요한 대화가 남았다.

-애초엔 윤상원 열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고 들었는데요.

“윤상원 열사는 민주항쟁의 대표성을 띤 인물입니다. 그런데 작품을 다듬다 보니 사람 냄새가 안 나요.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너무 어려운 얘기가 된 것 같더라고요. 지식인이 주인공이라서 그렇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5·18은 소시민이 중심이 된 항쟁입니다. 제 영화에 ‘지식인’이 없다고 하지만, ‘지성인’은 있습니다. 아무리 못배운 사람이라 해도 진실을 실천하면 지성인입니다. 지금은 지식인보다 지성인이 중요한 사회입니다.”

↔윤상원 열사. 광주항쟁 당시 반란군들의 학살에 맞선 자위적인 무장투쟁 한복판에 있었고 투쟁의 정당성을 대변했던 광주시민의 대변인. 영화에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광주항쟁을 이끌어갈 경우, 그의 삶과 투쟁의 세부를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 관객 입장에서 “너무 어려운 얘기가 된다”는 김기훈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비록 결과도 아니고 지워진 과정이긴 하지만, 김지훈이 윤상원 열사를 ‘민주항쟁의 대표성’ 맥락에서 다뤘던 것은 명백한 흠결이다. 누가 누구를 대표한다는 말은 100% 권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럼, 상상의 광주항쟁에서 실제 광주항쟁에서 고결한 전사였던 윤상원 열사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지식인다운 지식인. 존재들의 삶의 현장에 있을 때, 그 현장에서 자기 존재의 삶을 추구할 때 그 현장과 그 현장에서 빚어내는 삶의 진실함이 그것일 것이다. 이 경우조차 지식인은 ‘존재들의 일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들은, 모두는 ‘누구의 모두가 아닌 각자의 모두’ 아닌가. 지식인을 세우지 마라! 그것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한 따라서 공허한 일에 불과하다.

↔김지훈의 지성이란 ‘진실의 실천’이다. 지성의 발휘는 이론적 지식이 아닌 실천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필요, 긴급한 필요에 기반한 바로 그것. 실천적 지식은 결코 이론적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론에 도달하기 위한 추상적 일반화의 능력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바로 판단하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실천적 지식이 지닌 뜻이다. 누구에게나 우리들에겐 지성이 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의지, 탐구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들이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해 진리를 찾도록 결정되어질 때, 우리들을 진리 탐구로 몰고 가는 것은 어떤 폭력을 겪을 때다.”(질 들뢰즈) 폭력이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다.”(질 들뢰즈)

광주항쟁에서 반란군들의 잔혹한 학살은 폭력, 감당할 수 없는 기호였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것에 대한 사유를 강요했다. 반란군들의 잔혹한 학살이라는 그 기괴함에서 존재들, 바로 광주시민들은 동시적으로, 다발적으로 그 기호를 사유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의 일치, 광주시민들이 자위적인 무장투쟁으로 반란군들의 학살에 맞선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폭력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사유를 자극하고 강요하는 그 기호는 무엇인가? 그것이 분명해질 때, 우리들이 분명해질 때, 우리들은 모두가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 80년 5월 반란군들의 잔혹한 학살이 다시 쓰여지고 다시 읽혀지고 있다. <화려한 휴가>는 개봉 20일만인 13일 현재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까. 우리들에게 그것은 피해갈 수 없는 기호다.

역사의 풍경을 뒤바꿀, 그런 역사는 우연처럼 찾아오는 법. 그 때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들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란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 묻고 또 묻고, 부딪치고 또 부딪치는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만 역사는 찾아온다. 더 이상 패하지 않을, 그런 역사!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과거의 말은 언제나 신탁(神託)이다. 그대들은 단지 미래의 건축가로서, 현재의 지혜로운 자로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미래를 건축하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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