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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 기사입력 2008/11/17 [13:31]

유언

벼리 | 입력 : 2008/11/17 [13:31]
▲ 탈상하는 날, 상복을 태우며. 충남 홍성에서.     © 2009 벼리

장인어른 탈상하는 날에도 아내는 몹시 울었다. 장례 날에도 어찌나 울었던지 일가친척들은 물론 온 동네사람들을 울린 그녀였다. 그런 아내 탓일까. 나는 탈상 후 상례 음식을 나누는 처가 식구들을 뒤로 한 채 상복을 태우며 아내가 목 놓아 울던 장인어른을 생각했다. 어느 새 누런 상복들은 검은 재로 변하고 있었다.

장인어른은 그저 성품이 강직한 딸자식을 믿고 내게는 결혼 후 단 한 마디의 질책도 건네주시지 않은 어른이셨다. 평생을 시골서 농사지으신 분이라 오래오래 사실 것으로 기대했는데 뜻밖의 폐암으로 일흔 하나에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지금 장인어른은 그저 더 사셔야 했는데 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환한 미소로만 떠오르는 어른이시다.

죽음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장인어른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내세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말들은 내겐 단지 환영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 태도가 특별히 무신론자라든가 반종교적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내겐 삶에서 할 일들,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다는 것, 그 일들을 하기에 나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할 뿐이다. 그만큼 삶은 죽음의 외부로 존재한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삶의 관점에 굳건히 섰을 때 그 죽음의 모습은 세 가지로 내게 다가온다. 우리 모두의 죽음, 타자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우리 모두의 죽음은 실은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죽음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은 죽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의 죽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내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죽음 뿐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목 놓아 울던 장인어른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런 그녀의 상처와 슬픔을 나라고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따라 나 역시 그 어른의 죽음을 아픔과 안타까움 속에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누런 상복들이 검은 재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그러나 나는 슬프지만은 않다. 아내는 얼마 전 장인어른이 항암 치료를 받던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당신을 간호하면서 당신이 그녀에게 남긴 유언을 슬며시 내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그런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이 유언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한 인간의 무게가 실린 말씀으로 나를 지배할 것이다.

“너희들 세상이다.”

이 유언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아내가 들려주었다. 그것을 그녀는 ‘세대교체’라고 말했다. 그렇다. ‘교체’를 통해서만 세대는 영속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세상이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 어머니의 세상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들의 세상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세상이 있다. 역시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교체를 통해서 아들 딸의 세상이 온다. 영속은 이런 교체를 통해서만 영속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인어른의 유언은 당신이 사시는 동안 잘 사셨고 잘 사신 만큼 그 삶이 속한 아버지 어머니의 세상을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내게 들게 한다. 이 유언을 들려준 그녀에게 나는 혹시 딸자식으로서 장인어른에게 들려준 얘기는 없었는가를 물었었다. 장인 장모께서 성품이 강직한 아내에게 보이지 않게  의지하신 것을 나는 낌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인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그 말을 그녀가 들려주었다.

“아버지,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셨어요.”

왜 이렇게 말씀 드렸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존경하고 인정하는 삶은 위인도 철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장인 장모 바로 아버지 어머니를 그런 위인으로 철인으로 삼은 사람이다. 적어도 나는 이런 태도가 당신들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치를 멀리서 찾지 않는 그녀의 독특한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내는 함께 한 삶에서 내게 ‘자연법칙’이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내 사유의 운동에 강한 임팩트를 주었다는 점에서 내가 그녀를 벗으로 스승으로 여기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세계의 변화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물론 머물지 않는 변화를 보는 공통의 지반 위에서다. 현실의 변화, 사유의 운동이 무한의 경향성을 보이는 한 그녀의 경계심은 거의 생리적이다. 내 곁에 거의 유일자로서 엄격하면서도 친근한 유물론자로 나는 그녀를 느낀다.

그런 그녀와 나 사이에는 서로를 묶은 이 세계에 대적했던 젊은 날 함께 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만 수긍할 뿐인 한 인간의 삶의 모습들-아이 낳고 기르는 여자, 어리석음에 빠진 사내를 질책하고 거두는 여자, 어머니, 잘못 행하는 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 이웃의 차이에 대한 이해, 그녀스러운 눈과 같은 모습들이 있다. 언젠가 “붓다야말로 지상 최고의 사기꾼”이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목 놓아 울던 그녀,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에게 한 여자와의 행복한 삶을 당신의 삶이었노라고 들려준 그녀에게 타자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녀의 몫이다. 그러나 그녀 곁에 있는 나에겐 어떤 강렬한 느낌이 스며 든다. 필립 아리에스가 말한 것처럼 ‘죽음은 아름다움’(<죽음 앞에서 선 인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것이다.

사그라드는 불길 속에 드러나는 한줌의 재를 보며 떠오르는 장인어른 생전의 환한 미소를 지울 길이 없다. 나는 밀려드는 짙은 슬픔에 그 어른이 나고 살아온 눈 앞에 펼쳐진 너른 들녘과 오늘따라 그 들녘을 내리누르는 희뿌연 하늘을 마주한다. (또 한 분의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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