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어떤 스님이 문안을 드렸는데 스님(玄沙 師備, 835-908)이 말했다.(一日僧訊次師云) “여러분은 여기에서 동서사방으로 이르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你諸人還識者裏東西四至也無) 행사(行思)스님이 말했다.(行思云) “다 압니다.”(總識了也) 스님이 말했다.(師云) “불법은 그런 이치가 아니다.”(佛法不是者箇道理) 어떤 스님이 물었다.(僧問) “무엇이 동서사방으로 이르는 것입니까?”(如何是東西四至) 스님이 말했다.(師云) “사옹(謝翁 : 玄沙)이 조금 전 말했는데도 모르는구먼.”(謝翁適來也道不識) 현사광록(玄沙廣錄)에 나오는 문답이다. 와 닿는 게 있다. 물음은 현사의 처음 말 “여러분은 여기에서 동서사방으로 이르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고, 답 또한 현사의 마지막 말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모른다”에 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 꼴이 되어 버렸다. 문답 중간에 행사와 어떤 스님이 끼어들었다. 행사는 현사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고, 어떤 스님은 현사로부터 이미 행사의 답이 부정 받았음에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현사로 하여금 자답하게 한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특히 어떤 스님은, 현사의 부정에 담긴 실마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스님은 귀가 먹었다고 하면 딱이겠다. 행사의 말이 현사의 부정을 받은 것은 생각이 불러일으킨 답이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자아와 그 짝인 대상이 결합한(철학자들이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들끓는 욕망과 무명(無明)의 원인 그것이다. 현사가 부정한 것은 ‘이치는 생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현사의 부정은 그 어법으로 보아 단호하다. 현사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생각으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여기에서 동서사방으로 이르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는가? 그럼, 무엇이 동서사방으로 이르는 것일까? 그럼,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답해보자. 그러나 모방은 금물이다. 답은 물음에 있고 그 답은 이미 현사가 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다,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말로 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문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그럼, 저가 아는 것을 하나씩 들춰 그것이 과연 아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런 훈련 없이 여기 문답을 알아차릴 방도는 없다. 청허당(淸虛堂)이 이런 시를 남겼다. 뜬구름 부귀영화 별 관심 없나니(浮雲富貴非留意) 와각공명인들 어찌 나를 잡으리(蝸角功名豈染情) 화창한 봄날 늘어지게 자다가(春日快晴春睡足) 산새들 온갖 소리 누워서 듣네(臥廳山鳥白般聲) 청허당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해서 전결(轉結)이 와 닿는다. 절구(絶句)다. 봄을 따라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베란다에는 겨울을 함께 보낸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도 있다. 그래, 집은 답답하다. 좀이 쑤신다. 어디 아지랑이 피어나는 남쪽 들녁 한없이 걷고 또 걷고 싶다.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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