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물었다. 그가 산이 솟아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에겐 산이 자신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기에 이런 답이 가능했으리라. 나와 떨어져 있는 산은 분명 솟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산에 사는 사람에게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산이 나를 품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으리라. 이런 답을 하는 사람에게 산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 그는 산에서 사니까. 산을 본다. 산들은 땅 위로 솟아 있는 듯도 하고 하늘 아래 앉아 있는 듯도 하다. 니체의 초인 아니면 좌선하는 선자(禪者)가 아닌가. 그런가 하면 저 산들은 골짜기와 물길, 바람길을 품고 어둠과 햇빛을 받아 생기를 보존한다. 어느 선까지는 사람을 용인한다. 그래서 사람의 길과 집, 밭과 마을이 산에 기대어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보는 저 산들처럼 산은 첩첩첩(疊疊疊)하고 어디선가는 너른 들에 기꺼이 자신을 지워냈으리라. 아니면 큰 바다 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선 채 벼랑 끝 절망을 토해내고 있을 것이다. 산을 보았다.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게슈탈트 아니면 화(化), 이것이 바로 산이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뿐이다. 이 단정조차 실은 의미하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 옛사람들이 나눈 문답이 떠오른다. “다복산의 대숲은 어떻습니까?”(如何是多福一叢竹) “한두 줄기는 비스듬하지.”(一莖兩莖斜) “잘 모르겠습니다.”(不會) “서너 줄기는 굽어 있지.”(三莖四莖曲) 산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느낄 수 있을 뿐이며, 겪을 수 있을 뿐이다. 산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산에 오르고 산에 들고 싶은 사람은 산에 들면 된다. 이러할 뿐,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봄이 오는가 보다. 햇볕이 참 따스하다.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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