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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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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 기사입력 2008/11/22 [22:46]

벼리 | 입력 : 2008/11/22 [22:46]
▲ 비록 제한된 경험, 지식에 불과하지만 나는 한란과 한란이 살 수 있는 자연조건들을 잘 이어주기 위해 적절한 빛과 그늘, 적절한 관수와 단수, 공기의 흐름과 단절, 따스함과 차가움을 조절한다. 덕분에 나는 지금 한창인 한란 꽃 곁에서 그윽한 한 때를 즐기고 있다. 나는 신과 함께 있다.    © 2008 벼리

오, 신이여! 나약한 인간은 이렇게 외치고선 묻는다. 과연 신은 있을까? 없을까? 이렇게 사람들은 신의 존재 유무를 묻는다. 사람들은 왜 신의 존재 유무를 묻는가? 신의 존재 유무를 묻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인간이 완벽한 어떤 것이라면 인간에게 신은 애시 당초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그 존재 유무를 따지기에 앞서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된 또는 발견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성찰로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신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인간이여! 이 점에서 신은 인간에게 여전히 필요한 어떤 것이다. 이때 인간이란 누구일까?

누구나 인정하듯 고립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이 점에서 신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다름아닌 사회다. 사회가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불완전함이 문제인 것이다. 이 점에서 사회가 신을 사회 밖으로 추방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신의 추방은 사회의 불완전함을 은폐하거나 또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만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경제적 이익, 정치적 이익의 담지자들이 있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으쓱거리는 자들은 으쓱거리는 방식으로, 아부하는 자들은 아부하는 방식으로 저마다 이익을 챙기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회가 여전히 신을 필요로 한다고는 하지만 그 사회는 공동체와 같은 것은 아니다. 농업공동체와 같은 전근대적인 공동체는 사실상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또 자본주의 개시 이래 전근대적인 공동체를 대신해 의도적으로 위로부터 조직된 방식을 통해 나타난 국민과 같은 상상의 공동체 역시 사회는 아니다. 내셔널리즘으로 묶인 국민이란 공동체는 결코 사회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는 단지 개인과 개인이 필요에 의해 맺어지는 사회를 의미할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의 개인을 나는 사회-내-개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즉 언제나 사회-내-개인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회가 역사상 처음 등장한 것은 이른바 계몽주의 등장 이후다.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은 계몽주의 등장 이후 사회-내-개인과 신의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회-내-개인을 전제하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신의 존재 유무를 묻는다는 것은 사회-내-개인으로 신의 존재 유무를 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언제나 사회-내-개인으로서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인간의 감동이 아무리 벅찬 것이라고 해도 다른 강도가 약한 느낌들과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시시한 재미가 있는가 하면 짜릿한 재미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인간의 생각도 그것이 수준 높은 깨달음의 차원이든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의 차원이든 전혀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신이 의인화된 어떤 것(가령,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성상, 절집의 부처님상이나 관세음보살상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개 신은 이 의인화된 신으로 등장하고 만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부처님, 거룩하신 말씀. 거룩하신 음성.

그러나 의인화된 신은 역으로 인간의 느낌과 생각으로 포착되는 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혐의가 짙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른바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일그러진 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일그러진 신과 함께 있는 교설 역시 그러하리라. 하나님 말씀, 부처님 말씀, 맹자님 가라사대. 그래서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있는 그대의 인간이 아니라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하는 인간을 머리 속에 그린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인간이 당초부터 불완전한 것이라면 신은 당초부터 완전한 어떤 것이리라. 따라서 신은 인간의 느낌과 생각을 넘어선다. 그렇다고 초월자로서의 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초월한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초월자로서의 신은 인간과의 완벽한 단절이며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인간은 생각보다 감수성이 예민하며 매우 영민하다. 인간은 하얀 백지 위에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에 유토피아라는 지상낙원을 그려낸 것처럼 인간은 이 완벽한 무의 백지장에 유토피아 이상 가는 영원한 천국, 왕생의 극락정토를 그려내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제로기호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무의 논리 앞에서는 어떤 인간의 논리도 맥을 추지 못한다. 어떤 학인이 묻기를,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선사 답하길, 무!

신이 초월자로 다가오는 한, 신은 전지전능자이며 창조자다. 신은 마음만 먹으면 죽은 인간도 벌떡 일어나게 할 수 있고, 신을 믿지 않는 미몽의 인간을 거듭난 인간 곧 신의 종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작용의 방식으로 마음먹을 수 있는 초월자는 반대로 마음먹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초월자로서의 신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어떤 방향이나 목적이라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 이런 초월자로서의 신은 그러나 인간의 불완전함에서만 비롯되고 발견되는 완전자로서의 신에 위배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인간을 이끌어가고 있다, 어떤 목적이나 의도 아래 인간을 다룬다, 그런 신.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본 독재자들을 안다.

완전자로의 신은 어떤 것일까? 신의 문제를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나는 완전자로서의 신을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 상황들에서 본다. 여기서 ‘어찌할 수 없는’이란 말은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포착되는 경우, 포착되지 않는 경우 다 포함한다.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포착되지 않는 신을 나는 알 수가 없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이 불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느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는 만큼 그 신에 대해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주 속 한 티끌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포착되지 않는 신을 결국 나는 알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포착되는 신을 나는 알 수가 있다. 그런 신은 도처에 있다. 가령 나는 꽃을 좋아한다. 이즈음 내 곁에는 한란 꽃이 한창이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저 놈이 어떻게 저런 고고한 꽃을 피우고 저런 도도한 방향을 흩뿌리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한란이 한란임을 안다. 비록 제한된 경험, 지식에 불과하지만 나는 한란과 한란이 살 수 있는 자연조건들을 잘 이어주기 위해 적절한 빛과 그늘, 적절한 관수와 단수, 공기의 흐름과 단절, 따스함과 차가움을 조절한다. 덕분에 나는 지금 한창인 한란 꽃 곁에서 그윽한 한 때를 즐기고 있다. 나는 신과 함께 있다. 뿐만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나는 신을 본다.

“있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하겠다.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인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런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런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자본론 제1판 서문)

마르크스가 말한 자연사적 과정이란 내가 이미 말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있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하자면 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란 굴종이나 굴종의 내성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인 억압과 억압의 내성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런 도덕적인 시선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동정하는 일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다만 나는 자본주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라는 그 자체의 원인으로 운동하는 자연을 볼 뿐이다. 이것이 내가 보는 신이며, 이 신을 ‘목적’을 갖고 짓밟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반대로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 모두에 대해 내가 곁을 주지 않는 이유다.
 
  • 高度
  • 슬픔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 無題
  •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 이것은 神이다
  • 몽골 초원에서
  • 계란으로 바위치기
  • 어떤 사소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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