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초원의 촉감이 전해진 순간 그만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몸부림치는 땅, 전율하는 몸, 그 혼융의 절감! 나는 맨발이었다. 푸른 늑대가, 늑대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었을까. 광활하고 두터운 대지. 육중한 크기, 찌를듯한 무게로 압도하는 적나라한 산. 눈앞에 펼쳐진 그것은, 내게 풍경 곧 문화를 통해 매개된 자연의 경관이 아니었다. 사람이 땅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그 땅 자체였다. 마침내 초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화와 문명, 사상과 의지 이전의 어떤 것으로. 띵!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사람이 사람인 그 강렬한 느낌! 온갖 교(巧)를 물리친 그 단졸(單拙)함의 세계! 그랬다. 내 삶, 내 삶의 방식을 유지시켜온 문화와 문명, 사상과 의지는 차라리 사치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것은 인신의 억압, 자유의 구속이었으리라. 그러할진대 그 삶은 마치 말뚝 주위를 빙빙 도는 묶인 개와 같지 않았을까…. 무작정 걸었다. 뛰기도 했다. 이따금 몸이 휘청거렸다. 강한 바람 때문이었다. 걸음은 어느 새 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몽골 사내를 태운 말 한 필이 눈앞을 가로지르며 질주했다. 글 한 줄 모르는 문맹의 사내 칭키스칸. 그가 유라시아제국을,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노마드의 제국을 건설한 이유를 눈앞에서 보았다고 해야 할까. 노마드의 힘, 그 위대함!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초라함…. 그러나 무기력감만은 아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게 있었다. 뾰족한 그것.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며 능숙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몽골 병사들을 이끄는 장수의 소리나는 화살인양. 아팠다. 그 소리. ‘강해야 한다, 달려야 한다, 대지의 아들이여!’ 다시 걸었다. 점점이 뿌려진 민들레, 에델바이스. 그 생명의 네트워크. 문득 여자가 그리웠다. 밤이 기다려졌다. 오늘 밤 초원에 쏟아지는 초록별들 앞에서 또 어떤 아픔이 찾아들까. 가령 그것은, 절대고독, 그런 류(類)의 것은 아닐까…. 머리 위 푸른 하늘에선 송골매가 유유히 원형비행 중이었다. 나는 맨발이었다.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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