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한가위를 코 앞에 두고 모란장을 나섰다가 장 한 귀퉁이에서 그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기억의 강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습니다.
불현듯 전쟁통 피난길에 시신도 거두지 못한 채 비극의 삶을 마감한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입니다. 물론 할머니 얼굴은 기억될 수 없습니다. 본 적이 없으니까요. 기억하는 사람은 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세대에 속해있으니까요.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될 수 없는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선산을 찾을 때마다 할머니의 빈 무덤을 말없이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들은 단 한 마디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네 할머니께서는 전쟁 전에 청포장사를 했지......" 모란장 한 귀퉁이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막걸리를 내고 녹두전을 부치는 아낙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순간, 까닭도 모르게 '파랑새' 노래가 나지막히 들려왔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계산될 수 없는 시간을 타고 이 땅의 무수한 이름없는 민초들이 파랑새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눈시린 가을하늘처럼 상실의 빛깔을 띄며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 오는 듯했습니다. 물론 기억하는 것과 눈 앞에 벌어지는 것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기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만큼 누구나 자기 가슴에 안고 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기억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내 한가위 밑 모란장터에서 막걸리를 내고 녹두전을 부치며 옴살스럽게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에 마음 깊이 경의를 표했습니다. 대한민국 1번지 서민의 도시, 성남의 서민들과 함께 해온 이곳 모란장이 아니고서는 가슴으로 느껴볼 수 없는 애틋한 삶의 풍광이 아닐런지요.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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