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무렵 처가에 갔다가 두어 시간 마을 인근 산에 들었다. 송림에 잠기고 싶었다. 송절(松節)이 아니다. 송록(松綠)과 송정(松靜)을 사랑하는 탓이다. 송림 속에서 단지 반복할 뿐인 보행은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어느 새 산의 콧잔등에 섰다. 그 콧잔등은 직립의 오만한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기어 다니는 짐승의 그것에 비유할 수 있고, 거기엔 예전 같으면 호랑이라도 앉았을 너른 바위가 자리잡고 있었다. 시야가 열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당당한 소나무들의 세상인 산들, 그 산자락마다 기댄 사람의 집들, 그리고 한가해 보이는 농한기의 너른 농토와 농토 사이를 가르는 길들. 그 밝은 풍광만큼이나 내 눈 역시 맑고 고요하다. 다시 산들은 이 산 저 산 나눠진 듯하면서도, 그러나 무채의 빛깔을 더하면서 겹겹으로 소실되고 있다. 이 때문에 시야에 펼쳐진 풍광은 묵(墨)의 산수화로 남는다. 자연의 산수화 속에 내가 있었다. 나도 그림의 일부, 그러므로 그림이리라. 이 때부터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은 내 귀를 적신다. 귀를 통해 전해오는 것은, 그러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말할 수없이 도저한 어떤 ‘흐름’이다. 눈 앞에 펼쳐진 풍광에서 농토, 길, 집과 같은 사람의 삶의 흔적들은 점재(點在)하거나 산재(散在)하면서 자연과 함께 한다. 이 완벽한 조화! 이 따사로움! 이 긍정! 이 충만함! 이로 인해 강렬하게 이는 몸의 느낌, 그 앎은 삶의 흔적들에 스민 '삶의 영속성'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 삶이 죽음으로 귀결하는, 그 개체적 삶의 유한성은 단지 사실의, 그 닫힌 눈에나 해당함을 몰록 깨닫는다. 사람과 함께 하는 자연,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영속성이 바로 귀로 전해 듣는 그 도저한 어떤 흐름이다. 마치 흐르는 물이 그러하듯 그 흐름은 모든 것을 적시고, 그 흐름 속에 내가 실려 있고, 실려서 흘러간다. 나는 행복하다, 무한하므로……. <저작권자 ⓒ iwa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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