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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달리는 말

벼리 | 기사입력 2005/02/20 [23:59]

끄달리는 말

벼리 | 입력 : 2005/02/20 [23:59]

▲ 빛과 어둠, 동시에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와 언어 밖은?     ©2005 벼리

 
사람은 말과 글 곧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럼, 사람이 쓰는 언어가 세상을 충분하게 읽을 수 있을까? 또는 어떤 사람이 쓰는 언어가 그 사람이 대하는 세상을 충분하게 읽을 수 있을까?
 
사람은 세상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읽는다. 세상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언어를 쓴다. 누구나 사람은 세상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언어를 쓴다.
 
또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컨텍스트(맥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시니피앙(記標)과 시니피에(記意)가 맺는 관계는 다르다. 이 점을 놓치는 한, 의사소통은 헛돈다. 대화 특히 논의나 논쟁이 어려운 이유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가 언제나 긴장의 지평 위에 있다는 것은 언어학의 기초상식에 속한다. 이 기초상식조차 몸으로 익히지 못한 자들이 언어를 다룰 때, 그 언어는 더 이상 소통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자기가 읽어낸 세상 '밖으로부터 오는 언어'는 읽혀지지 않는다. 설령 자기가 읽어낸 세상으로부터 온 언어라고 해도, 그 언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한 점에 박아 놓는 한, 역시 읽혀지지 않는다.
 
이 때부터 사람마다 언어에 대한 태도에서 두 가지 길이 나뉜다. 혹자는 자기가 쓰는 언어를 세우고 혹자는 세우지 않는다. 언어를 세운다는 것은 언어에 대한 집착을, 언어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어에 대한 태도에서 혹자는 집착하고 혹자는 집착하지 않는다. 후자는 이종적(異種的)이거나 이질적인 언어 또는 언어의 다양성 나아가 '아직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離言) 세상에 자신을 열어 놓기도 한다. 
 
집착이 마음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누군가 어떤 언어를 구사할 때, 그 언어의 사용에서 마음의 집착 여부를 알아낼 수 있다. 이 점에서 언어에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언어의 문제는 줄곧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준마는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달린다고 하던가. 언어를 세우지 않는 따라서 언어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不立文字'다. 따라서 불립문자는 언어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선어록을 대하면 '언어로써 언어를 버린'(以言遣言), 이른바 '언어를 끊어버린 언어'(絶言之言)로 가득하다. 그럼, 다음 문답을 통해 그윽한 불립문자의 향기를 맡아볼 수 있기를!
 
앙산(仰山) 혜적(慧寂 : 803-887년, 당대 스님)이 삼성(三聖) 혜연(慧然)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혜연이 말했다.
"혜적입니다."
혜적이 말했다.
"혜적은 바로 나야."
혜연이 말했다.
"제 이름이 혜연입니다."
혜적이 껄껄껄 크게 웃었다.
(앙산이 껄껄껄 크게 웃다, 禪問拈頌587)
 
  • 高度
  • 슬픔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 無題
  •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 이것은 神이다
  • 몽골 초원에서
  • 계란으로 바위치기
  • 어떤 사소한 즐거움
  • 조롱
  • 근조 서민경제
  •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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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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