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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와 마주치다

벼리 | 기사입력 2005/03/13 [14:12]

부도와 마주치다

벼리 | 입력 : 2005/03/13 [14:12]
▲ 안성 칠현산 칠장사 부도밭에서.     ©2005 벼리

 
부도를 마주치면 차가워진다. 미혹으로 사는 삶과 부처가 되겠다고 발심으로 수행한(어쩌면 부처가 되어 산) 삶이 어찌 같으랴만 냉엄하게 절제된 부도를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이나마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부도는 '놀람'(驚)이며 '깨어남'(警)이다.
 
그 절제의 미학을 허접한 말로나마 드러내면, 우선 그 단출하면서도 또렷한 종의 형상이다. 절집에서 종은 아침, 저녁으로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위해 울린다. 그 생명들 가운데에는 언젠가 내가 고통을 준 이도 있을 터이고 어쩌면 비 오는 날 밟고 지나갔을지 모르는 지렁이도 있을 터이다.
 
종은 그런 소리를 낸다. 종이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소리를 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스라이. 소리가 아스라이 사라지므로 그 끝에 문득 놀람이 찾아 들고 깨어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문득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으리라. 부도는 뭇 생명을 위해 아스라이 사라지는 소리다.
 
그 절제의 미학으로 또 다가오는 것은, 부도에 새겨진 당호(堂號)다. 일반인의 비석에서 보듯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생전에 무엇을 했는지 일언반구도 없이 간명하게, 다만 당호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생전의 징표로서 이런 절제가 부도 말고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떤 부도는 당호가 새겨져 있지 않아 이마저 귀찮게 여겼음을 알겠으니, 그 치열한 삶의 갈무리가 어찌 이처럼 철저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 철저해 보이는 절제의 미학도 어떤 측면에선 색안경을 끼고 마주했을 터이다. 오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끼가 끼든 비바람, 눈보라에 닳아 떨어져 나가든 땅과 물과 바람과 해와 달과 온갖 생명들과 함께 해오지 않았는가.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지금-여기까지 흘러와 다른 자연-나와 마주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내 허상(虛相)을 허상으로 갈무리하고 싶다. 알맞은 때가 오면 날려라. 훨훨 날려라. 먼지로 날아다니리라. 바람으로 날아다니리라. 그렇다. 부도, 그 차가운 놀람과 깨어남을 통해 결국 남는 것은 '쉬는 것(休)'이다. 쉴 수 있다면 크게 쉬는 것이다.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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